설정 기획자 vs 시나리오 라이터, 무엇이 다를까

들어가는 글

게임잡 시나리오 라이터 채용 공고
게임잡 등에 올라오는 시나리오 라이터 채용 공고를 보면, 표기된 직무명은 제각각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같은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게임 개발은 창조적인 일이다.

인벤토리의 아이템 아이콘부터 버튼 하나의 문구와 위치까지, 플레이어가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모든 요소 뒤에는 디자이너와 아티스트의 고민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런데 이렇게 쌓인 수많은 요소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세계처럼 보이도록 설계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시나리오 라이터, 컨셉 기획자, 내러티브 기획자….

이름은 조금씩 달라도, 많은 게임 회사에서 이 직군이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고, 캐릭터와 세계관 컨셉을 짜기도 하며, 필요할 때마다 게임 전반의 내러티브를 보강하는 역할까지 떠맡는다.

‘컨셉’이 필요한 일은 죄다 이 팀(혹은 이 사람)이 맡게 된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컨셉’이라는 것은 정말로 컨셉 기획자만의 영역일까?

예를 들어 보자. ‘전투 컨셉’을 기획해야 하는 사람은 컨셉 기획자일까, 아니면 전투 기획자일까?
우리 게임의 전반적인 룩앤필과 톤앤매너를 정해야 하는 사람은 컨셉 기획자일까, 아니면 비주얼 아티스트일까?

물론 실제 현장에서는 대부분 이들이 ‘협업’하는 구조로 일한다. 다만 굳이 말하자면, 전투 기획자가 전투 컨셉을 결정해도 되고, 비주얼 아티스트가 룩앤필과 톤앤매너를 주도해도 큰 문제는 없다.

림버스 컴퍼니의 로비 화면
림버스 컴퍼니의 로비 화면. 위 화면을 ‘UI 아티스트’가 컨셉 기획자와 협업 없이 단독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어떤 회사에서는 전투 기획자가 전투 컨셉까지 가져간다.
어떤 회사에서는 비주얼 아티스트가 룩앤필과 톤앤매너를 주도한다.

또 다른 어떤 회사에서는 전투 기획자나 비주얼 아티스트가 컨셉 기획자와 함께 앉아 ‘전투 컨셉’이나 ‘룩앤필·톤앤매너’를 같이 잡아 나가기도 한다.

이때 원활한 협업을 위해서는, 컨셉 기획자가 협업 파트너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포착하고, 그 요구를 자신의 생각과 함께 기획서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낼 수 있어야 한다.

이번 글에서는 설정 기획자가 원활한 협업을 위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 관점을 어떻게 기획서에 풀어 써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특히, 이번에 설정 기획을 맡았거나 맡게 될 주니어 기획자들이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떠올릴 수 있도록 써보려 한다.


설정 기획자의 업무

먼저, 설정 기획자가 실제로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부터 살펴보자. 아래의 A씨는 많은 현장의 설정/내러티브 디자이너가 겪는 평균적인 하루에 가깝다.

설정 기획자의 하루

꿈에 그리던 N모사에 설정 기획자로 취업하게 된 A 씨.

A 씨가 회사에서 보내는 하루는 대략 이렇게 흘러간다.


아침에 출근하면 전날 슬랙에서 확인 요청이 온 스레드부터 확인한다.

이번에는 새로운 캐릭터 원화가 올라왔다. A씨가 할 일은 자신이 작성한 ‘컨셉 기획서’에 적힌 방향대로 캐릭터가 구현되었는지 검토하는 것이다.

대부분 요소는 기획서에서 요청한 대로 잘 반영되어 있었다. 다만 몇 군데는 A씨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해석된 부분도 있었다.

A씨는 DM으로 담당 작업자에게 먼저 “작업물이 정말 좋다”고 피드백을 전한 뒤, 의도와 다르게 나온 부분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표현하고 싶었는지”를 차분히 물어본다.

A씨가 이번 주에 맡은 메인 업무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 게임 세계관 내의 ‘세력도’를 짜보는 일.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협업 부서에서 요청이 온 ‘아이템’의 컨셉을 붙이는 일이다.

두 업무 모두 공식 마감 기한은 이번 주 금요일이다.

A씨는 우선 시니어 컨셉 디자이너 B씨, 그리고 시스템 디자이너 C씨를 각각 찾아가 언제까지 중간 결과를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으면 좋을지 묻는다.

B씨는 “수요일쯤에는 한 번 중간 공유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C씨는 “급하지 않으니 이번 주가 아니어도 다음 주까지 주면 된다”고 답한다.

A씨는 ‘세력도 설계’ 업무의 우선도를 조금 더 높여 수요일까지 집중하기로 한다. 수요일에 공유한 결과가 B씨의 방향성과 어긋나지 않는다면 빠르게 마무리하고, 그다음에 ‘아이템 컨셉’ 업무에 본격적으로 집중할 생각이다.

점심시간이 지난 뒤, UI 아티스트 D씨가 자리로 찾아온다.

이번에 새로 들어갈 UI 아이콘과 레이아웃이 이대로 괜찮은지, 설정 측면에서 문제는 없는지 묻기 위해서다.

A씨와 D씨는 평소에 직접 대화를 나눈 적은 많지 않지만, A씨가 예전에 D씨가 참고할 기획서를 작성한 적이 있다. A씨는 그 문서를 다시 열어본 뒤, 먼저 “비주얼 완성도 자체를 평가하기보다, 설정 기획자 입장에서 설정이 잘 반영되었는지 위주로 보겠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기획서에 적힌 내용과 D씨의 시안을 나란히 두고 어느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지 꼼꼼히 비교한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D씨는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디자인 아이디어가 하나 있다며, 이 방향으로 시도해도 되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A씨는 그 아이디어가 현재 컨셉을 침해하지 않는지 하나씩 짚어 본 뒤,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다.
오히려 “그 아이디어대로 만든 시안도 보고 싶다”고 말하며 D씨를 격려한다.

D씨가 갑자기 찾아와 구두로 논의한 일이기 때문에, A씨는 대화를 마친 뒤 업무 채널에 간단한 정리 글을 남긴다. 자신의 상급자인 B씨와 D씨를 멘션하고, 방금 논의한 내용과 합의한 방향을 기록해 둔다.

퇴근시간을 5분 남기고, 오늘 있었던 일을 일일기록일지에 기록한다. 진행 상황에 큰 문제는 없었는지 묻는 B씨의 질문에 간단히 브리핑을 마치고, A씨는 사무실을 나선다.

A씨가 퇴근한 뒤, D씨가 A씨의 피드백을 반영한 수정 시안을 업로드한 알림이 울린다.

A씨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슬랙을 열어 시안을 한 번 훑어본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어떤 피드백을 줄지’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집으로 향한다.


위 이야기는 컨셉/설정 기획자 A씨가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를 간단히 옮긴 사례다.

이 하루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A씨가 세계관의 일관성과 팀의 합의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각 파트는 각자 작업을 하지만, 그 작업들이 같은 세계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책임이 설정 기획자에게 있다.

A씨의 업무는 “텍스트를 쓰는 일”이라기보다, 자신과 연결된 사람들인 B, C, D씨와 긴밀하게 협업하는 비중이 훨씬 크다.

상급자인 B씨에게는 주로 ‘상황 공유와 보고’를 한다. 함께 일하는 C씨와 D씨에게는 그들이 작업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설정에 기반한 피드백’을 제공한다.

설정 기획자는 협업 파트너의 결과물을 단순히 “컨펌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 혹은 팀의 방향성을 명확한 논리로 정리해, 협업 파트너가 가야 할 방향을 잃지 않도록 ‘안내하는 사람’에 가깝다.

설정 기획자는 게임 전반의 맥락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필자는 설정 기획자를 두고 종종 ‘깃발을 흔드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설정 기획자 혼자서는 만들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지만, 깃발을 흔들며 팀이 향해야 할 방향을 계속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설정 기획자가 없더라도 각 파트는 자신의 작업물을 만드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게임의 세계관과 설정, 전반적인 맥락을 하나의 방향으로 통일해 내는 일은 결국 설정 기획자의 몫이다.

정리하자면, 설정 기획자는 단순한 ‘설정 작성자’가 아니라 맥락과 방향성을 계속 확인해 주는 ‘브릿지’ 역할을 하는 사람에 가깝다.

설정 기획자 vs 시나리오 라이터

페이트 그랜드 오더 화면.
위 화면에서는 ‘영주’, ‘마술예장’, ‘아틀라스원’, ‘오시리스’, ‘이시스’, ‘메제드’ 등의 고유명사가 등장한다. 즉, 위 화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러한 개념들을 생각해낸 설정 기획자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페이트 그랜드 오더

위에서 ‘설정 기획자의 하루’를 설명했지만, 시나리오 라이터의 하루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대부분은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이 맡은 캐릭터나 스토리의 시나리오를 쓰며 하루를 보낼 테니까.

설정 기획자와 시나리오 라이터는 겉으로 보면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직무를 잘하기 위해 요구되는 역량은 꽤 다르다.

설정 기획자는 세계의 구조, 규칙, 맥락을 설계하고, 그 결과를 협업 부서에 전달하는 사람이다.​ 설정을 잘 짜는 능력만큼이나, 자신의 생각과 논리를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는 능력이 중요하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좋을수록 설정 기획자는 더 빛난다.

시나리오 라이터는 플롯, 씬, 대사, 그리고 서브텍스트 경험에 집중하는 사람이다. 플롯을 설계하고, 각 에피소드와 장면이 매끄럽게 이어지도록 논리를 짜는 일은 설정 기획과 닮은 부분이 많다. 다만 시나리오 라이터는 주로 텍스트와 연출에 집중하는 시간이 길고, 협업은 시나리오 리뷰·기능 구현이나 리소스 발주 요청 등 상황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특정 장면을 어떤 연출로 보여줄지 등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연출·기획 파트와 깊게 붙어서 일하기도 한다.

여기서 “설정 기획자가 더 우위에 있고 시나리오 라이터가 덜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게임 제작에서 모든 역할은 서로 물려 있으며,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게임이 완성되기 어렵다. 다만 각 직무를 선택할 때, 본인이 어떤 스타일의 일을 더 선호하는지 알고 들어가는 편이 좋다는 의미다.

현실에서는 많은 시나리오 라이터가 ‘설정 기획자’를 겸한다. “나는 시나리오를 쓰고 싶어요.” 라는 말을 한 사람들도 막상 회사에 오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과 훨씬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사실에 놀라기 쉽다.

자기 스스로 ‘설정 기획자’라고 생각하든 ‘시나리오 라이터’라고 생각하든, 협업 상대방이 볼 때는 똑같이 ‘설정과 시나리오를 담당하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특기 분야가 어느 한 쪽에 쏠려 있다면 나머지 하나의 영역을 잘 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럴 때일수록 ‘설정 기획자 모드’와 ‘시나리오 집필 모드’를 분리하는 게 필요하다. 자신이 설정 기획자로서 협업 상대방과 논의해야하는 일이 있다면 가급적이면 ‘오후’에 진행하고, 자신이 시나리오에 집중해야 한다면 ‘오전’에 해당 업무를 좀 더 집중하는 식이다. 그래야 자신의 머리속에서 설정과 시나리오가 뒤죽박죽되어 혼란스러워지는 일을 예방할 수 있다.

설정 기획자에게 필요한 역량

Chrzanow, Lesser Poland Voivodeship, Poland
남들이 그냥 보고 지나치는 것도, 설정 기획자는 꼼꼼히 관찰하고 그 속에서 흥미로운 맥락을 짚어낼 수 있으면 좋다.
ⓒChrzanow, Lesser Poland Voivodeship, Poland

설정 기획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설정 기획자에게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지 미리 알아두면 좋다.

비록 자신이 이미 설정 기획자이거나, 시나리오 라이터라고 하더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협업 파트너는 아래의 역량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역량들을 미리 습득하고 키워 둔다면 회사에서도 “맡기기 편한 사람”으로 더 인정받게 될 것이다.

자신이 아직 주니어 레벨이라면, 먼저 ‘세계관/스토리 구조 이해’와 ‘문서 작성·설명 능력’ 두 가지에 집중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다음 단계에서 협업툴, 시스템·UX 이해를 넓혀가면 된다.

  • 하드 스킬
    • 세계관/스토리 구조 이해
      • 만들고 싶은 세계관과 이야기를 큰 그림에서 설계·구조화할 수 있는 능력.
    • 캐릭터, 배경, FX,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해
      • 회사가 필요로 하는 캐릭터, 배경, 이펙트, 애니메이션이 설정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는 감각.
    • 문서 작성 능력
      • 제안서, 기획서 등으로 생각을 구조화해 전달하는 능력. “읽히는 문서”를 쓰는 연습이 중요하다.
    • PT 능력
      • 회의나 발표에서 자신의 설정과 논리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말하기 능력.
    • 협업툴 활용 능력
      • 노션, 컨플루언스, 사내 위키 등으로 설정을 DB처럼 정리·공유하는 능력.
    • 시스템/레벨/UX 기초 이해
      • 전투, 레벨 디자인, UX가 어떤 언어로 이야기되는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이해. 이 정도만 되어도 협업 파트너의 요구를 설정 언어로 번역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 소프트 스킬
    • 관찰력
      • 남들이 그냥 보고 지나치는 것도, 그 속에서 의미와 맥락을 짚어내는 능력.
    • 공감력과 커뮤니케이션
      • 다른 파트의 니즈를 잘 듣고, 그것을 설정 언어로 정리해 다시 돌려주는 능력.
    • 설득력 있는 설명
      • “왜 이 설정이 필요한지”, “왜 이건 안 되는지”를 감정이 아니라 논리로 설명하는 힘.
    • 장기 기억·정리 습관
      • 수많은 설정을 머릿속에만 두지 않고, 도구와 문서에 체계적으로 쌓아두는 습관.
    • 겸손함과 유연함
      • 본인의 설정이 100% 정답이 아님을 인식하고, 상대의 아이디어를 존중하며 함께 더 나은 답에 가까워지려는 태도.
  • 평소 습득하면 좋은 배경 지식(중요도 무관)
    • 시각 디자인
    • 역사, 지리, 철학, 심리학
    • 미래 기술·SF, 판타지 세계관
    • 서브컬처/모에 이론(어떤 캐릭터가 왜 매력적인지 분석하는 관점)
  • 평소 봐두면 좋은 작품
    • 게임: 만들고자 하는 게임과 장르·구조가 비슷한 타이틀
    • 영화/드라마: 비슷한 테마나 세계관을 가진 시리즈물
    • 애니메이션: 특히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작품(라프텔 신작 등)

글을 마치며

설정 기획자가 되고 싶거나, 설정 기획을 잘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위 글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설정 기획은 굉장히 즐거운 일이다. 자신이 생각한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들이 호응해주고 공감해주며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영역으로 뻗어나가는 일을 같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감이 부족하거나, 또는 설정 기획자가 아닌 사람보다 더 설정-맥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면 협업 시 곤경에 처할 수 있다.

그러니 꾸준히 자기계발하며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간다면 더욱 인정받는 설정 기획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연관글 목록

블로그의 지속가능한 운영을 위해

애드센스를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이용자 분들의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