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저번 글에서 우리는 ‘타투’를 중심으로 서브컬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짚고넘어가야 할 용어 중 하나인 ‘반문화’에 관해 알아보았다.
한마디로, 터부시되는 문화는 ‘서브컬처’라고 정의할 수 있다.
타투는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국가에서 터부시되는 문화이다. 이는 서브컬처가 왜 ‘서브(sub-)’라는 이름으로 주변인적인 용어 맥락을 갖는지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타투 말고도 전세계적으로 터부시되는 문화가 무엇이 있을까?
특정 국가, 민족, 종교 등으로부터 언급할 만한 어떠한 지엽적인 것보다는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 전체에게 적용될 만한 ‘터부시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여기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바로 성(sex)이다.
이번 글에서 우리는 섹스, 더 정확히는 ‘섹슈얼 콘텐츠’를 통해 서브컬처를 정의하고자하는 노력에 한발짝 더 다가가보고자 한다.
섹슈얼 콘텐츠의 정의
야동, 야애니, R18 동인지, 야겜, 포르노 영화나 야한 잡지까지…
인간의 성욕을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지는 매개체들이다.
인간의 성욕이 시작되는 시기, 그리고 그 당도는 당연히 개인차가 있다.
대체로 10대에 2차성징의 시작과 함께 성욕(리비도)의 해소 또한 일상생활을 위해 굉장히 중요한 욕구 중 하나로 자리잡는다.
현대 사회에서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반찬’들이다.
성욕 해소는 자신의 성기 또는 성감대를 자극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지만, 그 만족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반찬이 흔히 동원된다.
그야,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밥만 먹어도 되지만, 식사와 요리라는 ‘반찬’을 통해 더 큰 만족감을 얻는다는 것과 비교했을 때 반찬이라는 표현은 꽤 적절한 표현같다.
그리고 이러한 섹슈얼 콘텐츠 작품은 오늘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섹슈얼 콘텐츠는 단순히 남성향(주로 남성의 성욕 해소를 위해 생산되는)으로 한정되지는 않는다.
여성도 얼마든지 매력적인 여성의 신체나 남성의 신체를 보고 성욕을 느끼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섹슈얼 콘텐츠를 이용할 수도 있다.
리디 등에서 웹소설 상위권 등을 확인해보면 의외로 여성향 성인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여성향’ 또한 섹슈얼 콘텐츠가 노리는 하나의 장르로서 기능한다.
섹슈얼 콘텐츠(R18+)는 서브컬처인가?
서브컬처, 그 사전적 정의의 한계
그렇다면 사전에서는 ‘서브컬처’가 섹슈얼 콘텐츠를 하위문화라고 인식하고 있을까?
앞서 우리는 사전에서 하위문화(서브컬처)가 ‘소수문화’ 여부, 그리고 ‘매니아성’ 여부라는 두 가지 척도로 특정 문화가 하위문화인지 아닌지 구분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섹슈얼 콘텐츠는 서브컬처일까? 예를 들면, ‘야동’은 서브컬처일까? ‘야애니’나 ‘동인지’는 어떨까?
이러한 섹슈얼 콘텐츠가 서브컬처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때 ‘소수문화’ 여부나 ‘매니아성’ 여부를 잣대로 들이대자니 왜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야, 야동이나 야애니는 그 세부적인 장르(예: BDSM, Hentai Tag 등)에서는 소수문화나 매니아성을 띨지는 모르나, 야동 그 자체가 소수문화이자 매니아틱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동인지’라고 불리는 대체로 2차창작의 형태를 띠는 출판물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동인지 자체는 소수문화에서 출발했지만 ‘소수문화’라고 취급하기에는 전 세계에서 소비되고 있는 문화콘텐츠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매니아성’을 띤다고 말하기에도, 섹슈얼 콘텐츠 그 자체를 소비하는 성별이나 연령층을 보면 젊은층에서는 다수가 소비하고 있는 형태는 매니아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야 성욕(및 성욕의 해소)은 인간의 기본 욕구 중 하나이고, 이러한 성욕 해소라는 욕구는 인간의 기본 욕구이기 때문이다.
즉, 섹슈얼 콘텐츠는 소수문화도 아니고 매니아적이지도 않다.
이는 곧 서브컬처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섹슈얼 콘텐츠는 서브컬처가 ‘정말로’ 아닌 걸까?
서브컬처 정의 비판
이쯤에서 우리는 서브컬처의 정의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서브컬처’라는 정의 자체가 아무리 문화적 상대성에 의거해 지리적, 역사적 상대성을 띠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 용어적 정의는 어떤 문화 및 그 문화콘텐츠 전반을 규정하기에는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과는 과일이다라는 말은 참인 명제다. 이는 과일의 정의에 사과가 부합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예를 들자면, 양파는 과일이다라는 말은 거짓 명제다. 이는 과일의 정의에 양파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섹슈얼 콘텐츠’는 서브컬처인가? 라는 질의에 대해, 서브컬처는 명료한 답변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서브컬처의 정의는 ‘어느정도는’ 문화 요소를 정의하는 기준이 될 수는 있으나 특정 문화 양식 및 문화콘텐츠를 정의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정의’를 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섹슈얼 콘텐츠’가 서브컬처다, 또는 서브컬처가 아니다라는 두 입장을 모두 취하지 않는 대신에 어느 하나라고 정의할 수 없는 일종의 회색지대에 놓인 개념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섹슈얼 콘텐츠가 메인스트림(주류문화)도, 서브컬처(하위문화)도 아니라고 정리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정리해버리는 건 사실상 섹슈얼 콘텐츠가 어느쪽에 속하는지에 대해 정리하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하는 것 같다. 특정 (문화) 콘텐츠는 어떠한 형태로든 한 가지 부류에 속해야한다.
현재까지의 정리에 의하면 섹슈얼 콘텐츠는 전세계적으로 암암리에(?) 광범위하게 소비되는 문화콘텐츠임에도 불구하고, 주류문화라고 하기에도, 그렇지 않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어떤 경계선상에 걸쳐 있다.
이처럼 사전적 정의와 우리의 직관(정확히는 의심)이 어긋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야한다.
예를 들어, ‘천동설’이라는 말은 ‘지동설’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존재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그저 ‘이 세상의 중심은 바로 우리가 사는 지구다!’라는 만고불변의 법칙에 굳이 ‘지구 중심설’이라는 용어는 존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정리해보자.
섹슈얼 콘텐츠는 ‘소수문화’, 그리고 ‘매니아성’이라는 척도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개념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전에 실리지않았을 뿐, 주류문화 또는 서브컬처 중 하나에 해당하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은 단서가 필요하다. 필자는 그 단서의 끈을 섹슈얼 콘텐츠보다 더 상위 차원, 즉 섹슈얼 콘텐츠 그 자체를 성립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개념을 먼저 정의해보고자 한다.
‘섹슈얼 콘텐츠’의 상위 개념은 바로 ‘성 문화(sexual culture)’, 그리고 더 나아가면 ‘성(sex)’이 있다.
‘성(sex)’은 서브컬처인가. 아니면 서브컬처가 아닌가.
성(sex)은 서브컬처인가?
억압받는 성
‘성(sex)’은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다.
성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도덕적인것도, 비도덕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한 규범적 가치를 매기는 것은 인간, 나아가 그 인간이 살아가는 로컬(사회)이다.
상위 개념인 성이 가치중립적이기에, 일반론적인 성 문화도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성’이라는 주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그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해 검열되고 억압되어 왔다.
이슬람 여성들이 히잡을 착용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종교적 이유’라고들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근간을 파고들어보면 여성의 ‘정숙’을 위한 성적 억압임을 알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에서조차도 완전한 성적 자유는 사회문화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만약 내일부터 ‘공연음란죄’라는 법률이 폐지된다면 어떨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외부를 돌아다는 자유가 허락된다면, 길가에 나체의 남녀가 있어도 법적 구속력을 가할 방법이 없는 사회가 된다면 어떨까? 우리는 이 사회가 진정한 휴머니즘 사회에 한발짝 더 다가갔다고 생각할까?
대다수 독자분들은 그런 사회가 당장 내일 오지도 않을 뿐더러, 만약 온다면 사회 전반이 끔찍한 혼란에 빠지게 될 거라고 몸서리를 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인간의 신체를 옷이나 어떠한 것으로 가려야만이 사회가 정상적으로 기능한다는 발상 자체는 우리는 언제 어떻게 학습하게 된 걸까? 나아가, 인간의 자유권(벗고 돌아다닐 자유)을 국가가 나서서 침해해야할 만큼 성적 자유가 사회에 어떠한 악영향을 미치는지는 개인적으로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이처럼 성적인 ‘자유 표현권’이라는 주제 하나만으로도, 성 문화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 또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보수적이고 관습적인지 굳이 의심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성, 그리고 그에 준하는 공공연하게 언급하기 터부시되는 것들은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공통된 인식, 그것도 대체로 ‘보수적인’ 사회문화적 인식에 근거하여 언급되는 것조차 억압받거나 저항에 부딪힌다.
쉽게 말해, ‘성 문화(sexual culture)’는 주류 사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라 억압받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통제되는 성, 그리고 성 문화
이 세상에는 공공연하게 떠들기 어려운 금기가 존재한다.
우리는 부모님의 정신적-육체적 사랑의 결실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부모님은 각자의 부모님과 조부모님, 나아가 우리의 선조부터 대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선대의 ‘사랑’의 역사가 맺어낸 과실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성이지만, 성은 대표적인 금기의 문화다.
사랑은 아름답고 낭만적이지만, 이 또한 건조한 문장으로 옮기면 한없이 메마른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가령 아래와 같이 말이다.
하지만 과연 부모님의 그렇고 그런 얘기를 공공연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
우리는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럽게 그런 ‘불편한 진실’을 어렴풋이 인지하게 되지만, 그런 터부를 남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낙태’, ‘동성애’, ‘근친혼’, ‘성기할례’ 등은 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표적인 터부시되는 소재들이다.
이처럼 인간의 성욕과 관련한 문화를 종교, 사회, 정치 및 주류문화에 의해 노출, 언급, 활용 등이 엄격히 제한된 문화가 바로 성적 억압(Sexual repression)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남성이, 혹은 여성이 서로 상대방의 화장실에 들어가는 건 어떨까? 지독히도 급한 변의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화장실을 이용해야만 했다고 할 지라고 해도, 상대방의 성의 화장실에 출입하는 건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만큼 굉장히 나쁜 행위로 여겨질 것이다.
성적으로 개방적인 사회에서는 위의 예시들을 어쩌면 해프닝 내지는 지나치게 억압적인 규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독자분들은 어떠한가. 만약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람을 법적으로 규제하지 않는 사회. 그리고 상대 성별을 가진 사람이 나의 성별의 화장실에 들어오는 상황에 대해서 말이다.
아마 독자분들마다 생각하는 인식은 천차만별일 수 있겠지만, 대체로 ‘황당’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눈 앞에서 직접 보게 된다면 얼마나 더 황당할까. 그만큼 지금의 사회는 이러한 상황이 벌어질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그리고 엄숙하게 성적 경계를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있다.
자, 이제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성 문화는 사회가 엄격하게 선을 그을 정도로 ‘관리되는’ 문화이며, 이것이 극도로 제한되는 상태인 문화권(예: 대한민국)에서는 성인이 성인물을 보는 것도 국가 차원에서 관리 및 단속될 수 있다. 이는 비단 아동포르노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방송통신위원회 등이 나서서 섹슈얼 콘텐츠 전반을 검열하는 일을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보자. 국가에서 ‘검열’할 정도의 또다른 문화는 어떤 게 있을까?
예를 들어, ‘술’, ‘담배’와 같은 대표적인 성인만이 향유할 수 있는 기호품은 어떨까.
국가에서는 이들을 주세나 기타 세금을 매기며 확실하게 관리하고는 있지만, 억압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오늘 또는 이번 주 어딘가에서 술을 광고하는 모델을 보았을 확률이 높으며, 우리가 들르는 편의점에서는 우리 눈에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담배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 문화에 버금가는 억압(repression)을 받는 금기 내지는 터부시되는 대상이 되려면, ‘자살’, ‘방화’, ‘폭탄제조’, ‘마약’, ‘낙태’ 및 국가내란선동 등에 준하는 문화양식이어야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국가가 섹슈얼 콘텐츠를 거의 위 요소들과 동등한 선상에서 관리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최소한 대한민국에서는 ‘성’, 그리고 ‘성 문화’는 국가차원에서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억압받는 상태의 문화’이다. 그리고 사회규범적으로,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확실하게 터부시되는 문화이기도 하다.
‘성’, 그리고 ‘성 문화’는 (최소한) 국가차원에서 관리(검열)되고 있어 억압받는 문화이다.
따라서 대놓고 표현하거나 표출할 수 없는, 음지의 영역에서 암암리에서 쉬쉬하게 되는 문화이다.
쉬쉬하는 문화, 그리고 서브컬처
앞서 필자는 사전이 정의하는 서브컬처의 정의가 품지 못하고 있는 개념으로 반(反)문화를 꼽았다.
반문화란, 한마디로 (주류) 사회가 이 문화를 억압하고 있는 문화이다. 그에 따라 반문화는 음지에 숨거나, 사회 전반에 대한 반항의 불꽃을 강하게 불태운다.
필자는 ‘반문화’라는 용어를 사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저항적인 뉘앙스를 띠기 때문이며, 마치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투사의 이야기나, 아니면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전달되어야하는 사실이 검열되는 사회 속에서 진실을 추적하는 기자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니면, 주류 문화(성인 문화)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며 그들의 문화에 그대로 따르는 것을 저항하는 하위 문화(청소년 문화)라고도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시키는대로만 살아가지 않는 아이(청소년)들을 우리는 ‘비행청소년’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입장을 바꿔, 청소년의 입장에서 어른이 만들어놓은 사회를 바라보면 오히려 청소년들에게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어떠한 제약들이 답답하고 불필요한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예를 들어, 10대 청소년들에게 연애를 하지 못하게 하는 학교를 생각해보자.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이것을 규제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어른은 그리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특정 문화를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한다. 내가 파트너와 아이를 낳기 위해 하는 섹스는 사회가 장려하는 출산장려이지만, 미성년자가 서로 사귀고 연애하며 피임을 동반한 섹스를 하는 건 불필요하다거나 계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공공장소에서 진한 스킨십을 하는 것을 보고 눈꼴시렵다고 하지만 뭐라고 하는 대신에 쉬쉬하며 넘어가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계도’라는 것은 비교적 적극적 개입하는 뉘앙스를 띠고, ‘쉬쉬한다’는 건 소극적으로 외면한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어느쪽이든 간에 우리는 타인의 성적 스킨십을 불편하게 여긴다.)
어쩌면 이러한 내로남불식 해석이 자연히 벌어지는 건 성(섹스), 성 문화, 섹슈얼 콘텐츠라고 하는 성이라고 하는 소재가 사회적으로 ‘금기’의 영역을 건드리고 있어서가 아닐까.
우리는 공공장소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우리의 명예와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금기를 언급하는 걸 터부시한다.
‘성’은 대표적인 말조심해야하는 소재 중 하나이다.
금기는 사회에서 ‘터부시’되는 대표적인 ‘반문화’의 하나이다.
반문화는 서브컬처이다. 그러므로 반문화의 하위 부류에 있는 금기의 문화 또한 서브컬처이다.
금기는 그 자체로 사회에서 주변화(sub-)되는 존재이다.
따라서 성, 성 문화, 나아가 섹슈얼 콘텐츠는 ‘금기의 문화’이자 ‘반문화’에 속하기 때문에 서브컬처이다.
정리하는 글
여기서 우리는 섹슈얼 콘텐츠가 서브컬처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그 근거를 ‘반문화’, 그 속에 속해있는 ‘금기의 문화’로 삼았다.
성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개념이지만, 우리는, 우리 사회는 성이 금기의 문화라는 영역에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섹슈얼 콘텐츠, 그중에서도 ‘모에풍’ 그림체가 유독 성적인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디즈니풍 그림의 퍼리와 모에풍 그림의 미소녀가 서로 다른 척도에서 검열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서브컬처에 대한 논의는 이제 ‘생물학’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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