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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캐릭터 컨셉 디자이너가 알아야 할 기본기 세 가지

들어가는 글

캐릭터 컨셉 디자이너 희망편

누구나 한 번쯤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을 꿈꿔본 적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며 그 이모저모를 조형해 나가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캐릭터 기획이란 작게는 얼굴 표정부터 머리카락의 길이를, 더 디테일하게는 어떤 어깨장식의 재질과 색상까지 결정하는 일이다.

(컨셉) 디자이너가 세심하게 설계한 요소를 두고, 아티스트는 자신의 색깔을 입혀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 낸다.

그래서일까.

게임 업계에서는 캐릭터 디자이너를 누구누구의 아버지, 캐릭터 아티스트를 누구누구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일도 왕왕 있다.

내 자식같은 캐릭터들이 하나 둘 늘어갈수록 첫 자식에게 쏟았던 애정을 모두에게 줄 수는 없음을 이내 깨닫는다.

그럼에도 나름 아버지와 어머니의 경력(?)이 쌓일수록, 하나의 캐릭터에게 들어가는 수고는 줄어들고 만듦새는 더 정교해진다.

시간이 지나, 내가 만든 캐릭터를 보고 플레이어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

이 일을 직업으로 갖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다.

더욱 흔한 절망편

오늘도 아티스트가 내 자리로 찾아와서 내 기획안에 퇴짜를 놓는다.

의상, 무기, 색깔. 그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마음에 드는 게 없다.

다른 아티스트가 내 캐릭터를 맡았으면 좋으련만, 하고 마음 속에서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이제 아티스트의 입은 내가 꼭 넣고 싶었던 어떤 패러디의 오마주마저 빼 버리자고 한다.

아니. 이럴거면 당신이 컨셉 기획자를 하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하지만 그 말을 뱉는 순간, 내가 이 회사에서 존재할 이유가 하나 더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 꾹꾹 눌러 담는다.

다른 회사에서는 묵묵히 기획서대로 해 주던데, 여기 와서는 이 까칠한 아티스트가 마치 자기가 갑인 줄로만 안다.

대체 뭐가 문제인가요? 라고 되묻자 그는 잠시 입을 다문다.

아 사실 저도 정확히 뭐를 어떻게 고쳐야 나아질 지 잘 모르겠어요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뭘 어쩌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의 기획서는 아티스트님 마음에 안 든단다.

결국 팀장님에게 말해서 일정을 더 받든 야근을 하든 해서 기획서를 다시 써야 한다.

재밌어 보여서 시작했던 이 일을 괜히 시작했다 한숨이 나온다.

내 기획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누구나 자신이 서 있는 환경이 어디냐에 따라 희망편의 주인공도, 절망편의 주인공도 될 수 있다.

몇 년의 경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항상 통과되는 완벽한 기획을 한다는 보장은 없다.

경력이 쌓일수록 경계해야하는 건 ‘경력지상주의’이다.

내가 잘해서 통과되는 게 아니다.

내가 몇 년차라서. 또는 파트장이나 팀장이라서 통과되는 경우는 있다.

기획이 패스되는 이유가 내가 잘해서 그런 거라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상은 사람들이 그냥 ‘참고 넘어가 준’ 경우라면 어떨까?

이런 일이 마냥 당사자에게도 좋은 일만은 아니다. 부족한 기획서가 통과되는 일이 반복된다면 나는 내가 가진 기획의 취약점을 보완할 기회를 잃는다.

이런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주위에서 ‘물경력’이라는 평판이 스멀스멀 피어오를지도 모른다.

당신이 그런 물경력이 되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또는 필자처럼 회사에서 조금의 피드백만 들어도 집에 가서 심사가 뒤틀리는 ‘완벽주의자’라면, 절망편을 맞이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노력하지 않은 채로 항상 희망편의 주인공이 되는 걸 바라는 건 도둑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노력하면 좋을까?

내 기획의 어느 부분을 세심하게 신경쓴다면 ‘희망편’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을까?

하나: 독자가 이해할 수 있게

게임회사 중에서는 ‘시나리오 라이터’를 비롯해 게임 컨셉 디자이너를 두고 ‘작가’ 대우(취급)를 해주는 곳이 많다.

회사에서 워드나 엑셀에 하루 종일 글만 쓰는 글쟁이라는 편견에서 기인하는 듯한데, 이런 편견 만큼이나 그런 ‘작가’ 들이 글을 조리있게 잘 쓸 거라는 근거 없는 편견을 가진 조직 또한 존재한다.

필자가 그동안 거쳐온 대부분의 조직에서, 시나리오 라이터는 글을 재미있게 쓰는 기술은 있을지언정 글이 쉽고 조리있게 읽히냐는 점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어나 일본어 번역투 문장은 기본이고, 아예 일본어 단어를 한국어로 음차해서 서브컬처에서는 이 정도 단어는 흔히 쓰이니 독자(나 플레이어)도 문제삼지 않을 거라고 주장하던 사람도 있었다.

글을 어떻게 쓰든 작가가 쓴 글이 재밌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충분히 계실 듯하다.

실제로 판타지 소설 시장에서는 기본기가 부족한 글쓰기를 가졌음에도 맛깔나는 전개와 독자적 재미로 전국적인 인기를 끈 작품도 있다.

다만 게임업계에서는 시나리오 라이터는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기획자’ 중 하나다.

일반 게임 회사라면 모든 기획자는 회사에서 기획서를 쓰는 날이 온다.

즐거움과 웃음을 빚어내는 글솜씨를, 이번에는 특유의 논리와 게임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동료를 설득시키고 어떤 작업물을 만들기 위한 문서를 작성하는 데 써야 한다.

제 아무리 재밌는 글을 쓸 수 있어도, 동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글을 쓰는 사람은 기획자로서 더욱 분발해야 한다.

오탈자와 비문은 애교 수준이다.

한 번, 두 번. 열 번과 스무 번을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건지 이해가 안 되는 기획서도 흔하다.

작가가 쓰는 글은 재밌기만 하면 된다는 말은 궁색한 변명이다.

독자가 이해가 되게 써라.

당신이 문서를 워드로 쓰든, 엑셀로 쓰든, 파워포인트로 쓰든.

구어체로 쓰든 문어체로 쓰든 영어나 일본어로 쓰든.

한 페이지로 쓰든. 열 페이지로 쓰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자가 이해할 수 있게 기획서를 써야 한다.

며칠 밤을 새우며 쓴 희대의 역작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기획서라고 할 지라도, 읽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기획서를 쓰는 이유는 자기만족이 아니다.

독자에게 내가 가진 기획을 설명하고 설득하기 위함이다.

이해가 잘 되는 문서의 특징

목차와 머릿말이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나무위키’는 구조적으로 잘 쓰인 글(wiki)의 훌륭한 예시다.

나무위키는 목차가 있으며, 모든 목차는 각 대제목과 중제목, 소제목 등으로 연결된다.

하나의 글이 있으면, 독자가 원하는 정보는 그 안에 꽁꽁 숨겨져 있다.

그런데 목차가 있고 머릿말이 있으면 독자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에 훨씬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글을 읽고 난 뒤에도 자신이 어떤 내용을 읽었는지 파악하는 데에도 목차와 머릿말은 큰 도움이 된다.

반대로 말해, 목차와 머릿말이 없는 글은 다 읽고 난 뒤에도 자신이 무엇을 읽었는지 다시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최근에는 워드나 구글 독스 등을 비롯해 대부분 ‘워드프로세서’는 머릿말만 잘 적어도 자동으로 목차를 생성해주는 기능을 지원한다.

글을 구조적으로 쓰기만 한다면 목차를 수동으로 만들어서 고칠 필요도 없고 가독성이 크게 향상된다.

실제로 이 블로그에서도 글에 쓰인 모든 말머리는 H1부터 H4까지의 Heading 레벨에 따라 구조적으로 쓰여 있다.

문장이 짧고 간결하다.

잘 쓴 문장은 한 번만 읽어도 이해가 쏙쏙 된다.

문장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말과 글은 자연스럽게 중언부언이 되고 군더더기가 붙는다.

글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군더더기는 문장의 결론을 흐리고 독자가 혼란스럽게 한다.

이런 문장은 독자에게 불친절할 뿐만이 아니라 원활한 협업에도 큰 걸림돌이 된다.

한 문장 안에 너무 많은 정보를 담을 필요 없다. 적절한 지점에서 마침표를 써서 문장을 톡톡 끊어주는 것만으로도 문장의 읽는 맛이 살아난다.

모든 문장이 쉽고 평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획의 방향성이 확실하고 요점이 분명하다면 기획서에 쓰인 문장도 자연스레 홀쭉해진다.

굳이 독자가 이해할 수 없게 쓸 이유는 없지 않은가? 자신의 부족한 기획력을 숨기기 위해서 문장을 일부러 중언부언하는 경우가 있는데, 결국 글쓴기의 기획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머지않아 탄로나기 마련이다.

잘 쓴 글은 길게 이어붙인 글이 아니라, 읽기 쉬운 글이다. 자신있게 쓴 글이다.

문어체가 아니라 구어체로 설명한다.

기획서를 반드시 딱딱한 문어체로 적어야한다는 법이 있는가?

‘안녕하세요’ 처럼 해요체로 기획서를 적어도 아무도 문제삼지 않는다.

예를 들어,

‘캐릭터 속성은 총 네 가지이며, 캐릭터 속성이 적 약점 속성에 매칭되는 속성일 시 치명타 대미지’

라는 문장과,

‘캐릭터 속성은 모두 네 가지인데, 적 약점 속성에 맞는 속성이라면 치명타를 입힙니다’

라는 문장이 전달하는 정보량은 동일하다.

하지만 위의 문장에 비해 아래의 문장이 더 잘 읽힌다.

우리는 어떤 표현이 더 구어체에 쓰였을 때 적절한지, 반대로 문어체에 쓰였을 때에는 적절하지 않은지 잘 안다.

만약 기획서를 쉽게 쓰기 위한 방법이 고민이라면, 어느 날은 한번 구어체에 따라서 기획서를 써 보면 어떨까?

대상 독자 수준에 맞는 용어를 사용한다.

‘궁금하신 거는 거기 있는 테이블을 보시면 다 나와 있어요’

위 문장은 기획자나 프로그래머가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위 말을 들은 사람이 아티스트라든지 비개발직군 또는 개발지망생 등 현업에서 일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전혀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기획자나 프로그래머는 위의 문장을 보고 ‘아하! 그건 아까 지나간 엑셀(스프레드시트) 문서를 이야기하는 거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보면 ‘테이블? 테이블 위에 모니터랑 키보드 밖에 없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현업에 있는 모든 직군은 서로 자기들만이 알고 있는 은어가 있다.

그런데 그런 은어를 대상 독자가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고 기획서에 적는다면,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문서의 흐름을 전혀 따라오지 못할 수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궁금한 걸 그 자리에서 바로 질문하는 문화를 가진 조직이 드물지 않은가.

기획서를 쓰는 사람이 먼저 센스껏 자신이 쓴 문서가 은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는지 점검하는 게 좋다.

둘: 세계관/설정의 테두리

세계관과 그 설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말 것

당신은 이번에 양 손에 각각 석궁을 든 캐릭터를 기획했다.

이 석궁은 자동으로 장전되는 기능을 가졌으며, 신소재 경량화 금속을 사용해서 매우 가볍다.

여성도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볍지만, 쇠뇌의 파괴력은 바위도 부술 정도로 강력하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당신이 만들고 있는 게임은 ‘중세 판타지 세계관’이다.


세계관과 설정이 제대로 머리에 들어있지 않은 채 캐릭터를 만든다면 ‘핍진성 오류’를 범하기 쉽다.

주로 프로젝트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컨셉 디자이너가 하기 쉬운 실수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멋지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고 싶은 욕구는 누구나 있다.

하지만 그가 서게 될 무대가 어디인지 미리 파악하지 않고 일단 무대에 내보낸다면 관객들의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일단 ‘판타지’라는 테두리 아래에 있기 때문에 괜찮지 않으냐고?

이 정도는 독자들이나 플레이어들이 하등 신경쓰지 않는다고?

독자는 바보가 아니다.

독자 중에서는 작가보다 더 글에 대해 조예가 깊고 잘난 사람들도 널리고 널렸다.

실제로, 어떤 실무자가 들고 온 기획서를 일차적으로 누구에게 확인을 받는가? 바로 그 일에 도가 튼 ‘파트장’이나 ‘팀장’이 아니던가?

오류는 줄일수록 좋고, 빈틈은 미리 예방해서 잡아내는 게 좋다.

핍진성 오류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핍진성 오류는 대체 왜 문제가 되는 걸까?

문제: 핍진성이 부족하면 세계가 엉성하게 보인다

조선시대 배경에 ‘광선검을 든 메카 사도세자’가 등장하는 컨셉의 일러스트를 본 적이 있다.

그 포스트를 본 독자들은 하나같이 그 세계관이 너무 독창적으로 느껴지고 게임으로 나오면 너무 재밌겠다고 입을 모았다.

그렇다면 그런 컨셉 아트의 게임이 실제로 나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광선검 메카가 나오는 조선시대물을 그리기 위해서는, ‘조선시대’에 ‘광선검’이 존재할 수 있는 과학/기술 배경 설정이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만약 다른 모든 역사적 사실은 동일한데 광선검만 달랑 존재하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계관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광선검의 에너지원은 어디서 가져올 수 있을까? 애초에 대장간에서 만들 수 있는 물건일까?

만약 그 에너지원을 설정(예를 들어 어느 광산에서 나오는 신비한 물질)했다고 해도, 그 물질을 가공하는 기술은 어디서 개발된 건지 설득력 있는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미래에서 온 어떤 장인이 만들었다고 설정을 붙여버리게 되면, 그러면 그 미래에서 과거로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온 건지, 의사소통은 어떻게 한 건지, 그리고 그런 세계에서 왜 미래인은 과거인에게 기술을 전수해주었는지 등에 대해 꼬리질문이 이어지게 된다.

만약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든 예상 질문에 답변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독자들은 이제 만족하고 작품을 감상하게 될까?

아니. 그렇지 않다.

높은 확률로 이제 그 시대는 아마 우리가 알고 있던 ‘조선시대’로부터 엄청 멀어졌을 것이다.

이미 ‘광선검’이라는 판타지로부터 출발한 조선시대는 이제 조선시대마저 아니게 되어버리게 되는 거다.

세계가 엉성하게 보이는 게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핍진성이 부족한 세계에서는 모든 사건이 ‘돌발사건’처럼 느껴진다.

길을 가다가 트럭에 치였는데 천국에 갔다가 화장실에 빠진 뒤 로또에 당첨되었다는 내용만큼 앞뒤 연결고리가 빈약하고 허접하다.

예를 들어 빨간망토와 늑대에서 빨간망토가 광선건을 든 세계만큼, 읽었을 때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작품이 또 있을까.

해결: 세계관/설정이 허용하는 범위를 안다

어떤 조직에 새로 합류한 컨셉 디자이너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그 세계를 성립시키기 위해 기존에 마련된 ‘세계관/설정’ 문서를 읽어보는 일이다.

그러면서 그 세계에 허용된 ‘기술의 척도’를 파악해야 한다.

만약 이 세계가 ‘스팀펑크’ 장르라면, 이 세계는 비행선은 등장할 수 있지만 광선검은 등장할 수 없다.

반면,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라면 광선검은 등장할 수 있겠지만 ‘아이패드’와 같은 태블릿 PC는 어색하다.

왜냐하면 지금보다 훨씬 미래의 세계에는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사물이 오히려 ‘레거시(구시대의 물건)’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인간의 지능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을 가진 AI나 그 아바타가 등장하는 게 자연스럽다.

마법사가 등장하는 세계에도 자동차는 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자동차가 등장하는 세계에 반드시 마법사가 어울린다는 보장은 없다.

여신이 준 물건을 들고 다니는 검객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장장이가 총까지 만드는 세계는 존재하기 어렵다.

어떤 판단의 근거는 일부 사람에게는 지극히 주관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런 게 대체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제1의 독자가 어색하다고 느낀 건, 제2, 제3의 독자도 어색하다고 느끼기 십상이다.

바꾸지 않아봐야 시간이 지날수록 본인만 손해이니(?) 제1의 독자가 이상하다고 느낀 지점은 빠르게 고치는 게 낫다.

셋: 설정의 일관성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

당신은 이번에 어느 고풍스러운 집안에서 곱게 자란 설정의 소녀 캐릭터를 기획했다.

소녀는 어릴 적부터 검을 잡았는데, 그녀가 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 때문이었다는 설정이다.

한편 소녀의 어머니는 아이가 남자들보다 강해지면 나중에 결혼감이 될 사람이 없어질까봐 걱정하는 사람이다.

소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각기 다른 방향성 사이에서 갈피를 잃은 나머지 가출을 했다.

위 설정은 무엇이 문제일까?


분명 우리는 고풍스러운 집안에서 곱게 자란 소녀라는 첫 문장을 보고 캐릭터의 설명을 읽기 시작한다.

하지만 설정 마지막 문장을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방향성 사이에서 갈등한 나머지 결국 소녀는 가출을 하고야 만다.

그렇다면 이 소녀는 정말로 첫 문장에서 말했듯이 ‘곱게’ 자란 게 맞는 걸까?

(아마 일반 독자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설정 기획자는 종종 자신이 첫 문장을 뭐라고 적었는지 까먹는다.

캐릭터 설정을 하나씩 붙여 나갈 때마다 캐릭터의 설정은 점점 정교해진다.

하지만 여러 줄의 설정이 붙을 수록 첫 문장을 적을 당시 가졌던 캐릭터의 인상은 엷어지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첫 문장에서 캐릭터의 성격을 ‘츤데레’라는 키워드로 시작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똑같은 츤데레라는 범주 안에서도 다양한 유형이 존재한다.

주위 모두에게 인기가 있어 ‘인싸’ 취급을 받는 인싸형 츤데레가 있는가 하면, 모두에게는 소심하지만 특정 캐릭터(주로 남주)에게만 마음을 연 아싸형 츤데레도 있다.

그런데 인싸형 츤데레로 설정을 잡다보면 점차 ‘갸루’ 코드의 캐릭터 설정을 의식하기 쉽다.

금발 염색에다가 자유분방하게 입은 교복, 화려한 액세서리, ‘ㅋㅋ’ ‘레알?’ 등 비표준어 말투까지 설정이 붙다보면, 어느새 첫 문장에서 적은 ‘츤데레’라는 키워드는 점차 흐릿해진다.

다른 모든 설정에서 ‘갸루’ 캐릭터처럼 보이지만, 특정 말투에서 ‘흥’이라든지 틱틱대는 말투를 한다고 해서 츤데레가 성립되지는 않는다.

그저 갸루 캐릭터가 조금은 츤데레 느낌이 있다고 여겨질 뿐이다.

독자들은 캐릭터가 대체 어느 쪽인지, 츤데레인지 갸루인지 아니면 둘 다 만족하는 캐릭터인지 슬슬 헷갈려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헷갈리는 건 대체 뭐가 문제일까? 그냥 그런 거라고 넘어가면 안 되는 걸까?

문제: 캐릭터가 가식적으로 느껴진다

캐릭터성이 헷갈린다는 건 다시 말해, 캐릭터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캐릭터성은 단순히 캐릭터의 외양만으로 성립되는 게 아니다.

가령, 그 캐릭터가 다른 캐릭터들과 대화할 때의 말투에서도 특유의 캐릭터성이 강하게 묻어난다.

물론 독자가 캐릭터를 이해하는 과정은 보통 캐릭터의 ‘외양’을 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예를 들어, 어떤 캐릭터가 천진난만한 눈동자, 가지런한 머리칼,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들은 캐릭터의 외양을 보고 난 뒤 ‘아, 이 캐릭터는 모범생 캐릭터겠구나’ 하는 대략적인 감을 잡는다.

그 뒤 캐릭터의 입에서부터 전달되는 언어(말투와 몸짓)를 받아들이며 캐릭터에 대해 파악하게 된다.

잘 만들어진 캐릭터는 이 두 가지 요소가 크게 어색하지 않게 잘 조화를 이룬다.

그렇지 못한 캐릭터는 (보통) 외양으로부터 예측한 캐릭터성이 그 캐릭터가 구사하는 언어(말투 또는 몸짓)와의 불일치를 보이는데, 이는 독자가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가령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한 남자가 갑자기 서커스 단원처럼 곡예를 부리는 꼴이다.

물론 그런 캐릭터가 어딘가에는 존재할 수는 있겠지만, 충분한 배경 설정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어떠한 맥락없이 툭 튀어나온 캐릭터성은 독자에게 불편함만 안겨줄 뿐이다.

이런 캐릭터를 마주한 대부분 독자의 머리 속에서는 ‘저건 대체 뭐지? 음… 일단은 두고 보겠지만 뭔가 빨리 설명이라도 해주면 좋겠군’ 같은 생각이 들게 될 거다.

이러한 불편감은 처음에는 조금 참신해 보이지만(왜냐하면 기존에는 없던 캐릭터성의 조합이기 때문에), 머지 않아 대부분 독자들에게 외면당한다.

가식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원래는 그러지 않은 애가 그런 척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짜 광기라는 말이 있다.

세간에서는 어떤 미치광이 캐릭터가 등장하면 이 캐릭터는 ‘진짜 광기’냐 ‘가짜 광기’냐 하는 구분을 짓곤 한다.

여기에서 외양과 행위가 불일치하는 건 ‘가짜 광기’다.

누군가는 이러한 외양과 언어가 불일치함으로써 오히려 신선함을 줄 수 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물론 신선한 캐릭터성은 기존에 우리에게 익숙한 문법을 벗어남으로써 얻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익숙한 맛을 덜어낸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물을 낸다고 말할 수 없다. 중요한 건 독자들에게 납득이 가는가하는 ‘설득력’이다.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는 캐릭터성을 가지려면 클리셰에 따라 만든 캐릭터의 몇 배 이상의 공이 들어갈 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이다.

아예 설정 페이지에 ‘츤데레’라고 적혀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캐릭터 외양이나 말투, 캐릭터의 행적 등에서 츤데레 특유의 느낌이 서로 충돌하거나, 너무 적게 드러난다면 독자(또는 플레이어)는 그 캐릭터가 츤데레라는 설정이 있다는 걸 모르거나 믿지 않게 된다.

클리셰가 두고두고 비판받음에도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최소한 캐릭터 설정이 ‘일관성’을 지켰다는 점을 캐릭터 창작자들은 알고 있어야 한다.

해결: 핵심 설정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캐릭터의 외양과 언어를 서로 어울리게 하는 일은 캐릭터 메이킹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소위 말하는 ‘맛깔나는’ 캐릭터를 만들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그렇다면 어떤 작업을 병행해야 할까?

츤데레는 츤데레다워야한다. 마찬가지로, 선도부는 선도부답고, 전교회장은 전교회장다워야 한다.

어떤 캐릭터가 ‘나는 츤데레야’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게 와닿는 건 ‘흥! 너 따위 죽어버려!’라는 대사 한 줄이다.

츤데레는 츤데레답게 틱틱대는 대사와 특유의 앙칼진 대비가 두드러져야 하며, 선도부장 캐릭터는 꽉 막힌 고리타분한 성격에 모범생같은 행동 루틴의 소유자여야 한다.

츤데레라는 코드는 어떤 명확한 외양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전교 1등 품행방정 캐릭터이든, 초인싸 갸루 캐릭터이든 어느 쪽도 츤데레가 될 수는 있다.

독자에게 이 캐릭터가 츤데레 코드를 가졌다고 명확하게 인지시키기 위해서는 소위 ‘츤’이라고 말하는 틱틱대는 말투와, ‘데레’라고 말하는 호감이 드러나는 말투의 대비가 선명하게 부각되어야 한다.

‘흥! 너 진짜 짜증 나거든? 죽어 버려!’라는 말을 했다고 해도, 뒤돌아 보면 ‘그렇다고 진짜로 가 버리기야…?’라는 어떤 애정 결핍적인 호감이 드러나야 한다.

비단 이러한 대비는 말투에서만 드러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수집형 RPG를 비롯해 특히 비주얼 노벨 계열의 게임에서는 ‘표정’을 이용해 캐릭터성을 확실하게 인식시키는 데 활용할 수 있다.

가령 츤데레 캐릭터는 표정의 대비가 크다. 캐릭터가 츤일 때와 데레일 때 각각의 상황에서는 표정으로부터 전해지는 인상이 완전히 달라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쿨데레’, ‘쿨뷰티’ 계열 캐릭터는 표정이 적어도 충분하다. 또는 표정의 변화가 있더라도 큰 변화는 보이지 않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성격이 아니라 직업이나 역할군에 관한 예시를 살펴보면 어떨까?

가령, 선도부 캐릭터는 품행이 모범적일뿐만 아니라 어느 의미로 다소 ‘강압적’일 필요가 있다.

캐릭터의 성격 자체가 꽉 막힌 편일수록, 이런 강압적인 행동을 하는 선도부의 캐릭터성이 살아난다. 만약 선도부 캐릭터가 ‘헤헤~ 오늘은 그냥 봐 드릴게요~’ 같은 말투의 소유자라면 독자들은 이 캐릭터가 정녕 선도부가 맞는지 물음표를 띄우게 될 거다.

물론 어떤 하나의 직업적 모에 코드(예: 선도부 코드)를 두고, 다양한 캐릭터성을 전개해야 하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선도부원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학원물 이야기를 만드는 경우를 예를 들어보자. 이런 경우라면 다섯 캐릭터 모두가 위에서 얘기한 예시와 거의 유사한 말투와 외모를 가져야만 하는 걸까?

직업적 모에 코드(선도부 등)가 동일한 캐릭터들끼리는 보통 교복이나 제복 등 어떠한 ‘의상’이 동일하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학교가 같고 학년마저 같다면 교복의 디자인과 컬러는 동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다수의 학원물에서는 캐릭터의 성격을 의상보다는 ‘머리’, 정확히는 헤어 스타일과 인상(페이스 스타일)을 통해 두고 있다.

쉽게 말해, 캐릭터의 의상(교복 등)은 거들 뿐이며 하나의 캐릭터성은 헤어와 인상에서 대부분 결정된다.

동일한 선도부라고 할 지라도, 그 중에서도 정말 출중하게 그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려는 캐릭터가 있는가하면, 우연한 계기로 선도부가 되었을 뿐 선도부 활동은 설렁설렁 하는 캐릭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당위성 싸움이다. ‘왜’ 이 캐릭터는 이런 개성을 가졌음에도 선도부인지 설득력있는 논리를 전개하기만 하면 된다.

어떤 캐릭터가 독자나 플레이어에게 충분히 이해가 되고 공감을 사기 위해서는 A부터 Z까지 각 캐릭터의 특징 하나하나가 서로 톱니처럼 맞물리는 논리의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 캐릭터 설정 기획은 ‘논리’의 영역이다.

정리하는 글

지금까지 ‘게임 캐릭터 컨셉 디자이너가 알아야 할 기본기 세 가지’를 알아 보았다.

이번 포스팅의 결론을 세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 하나: 독자가 이해할 수 있게 쓰자.
  • 둘: 세계관/설정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쓰자.
  • 셋: 캐릭터 설정은 일관성을 가지자.

실무에서 더 잘하기 위한 방법은 무궁무진하게 많다.

그럼에도 필자가 위에서 꼽은 세 가지는 실무자들도 실수하기 쉬운, 그럼에도 너무나도 중요한 ‘기본기’에 해당한다.

모두가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다.

천천히, 차근차근 자신이 어떻게 글을 써왔고 어떤 부분에서 더 잘 할 수 있는지 고민해 나간다면 점점 더 동료들이 인정해주는 컨셉 기획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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