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우리는 지난 글에서 서브컬처의 사전적 해석으로부터 두 가지 척도를 도출했다.
- 매니아성
- 소수의 문화
이 두 가지 척도를 바탕으로, 재패니메이션 문화콘텐츠는 더이상 서브컬처가 아니라는 결론을 냈다.
그런데 이 결론을 내는 과정에서 서브컬처 여부를 판가름해야 할 한 가지 사례가 등장했다.
바로 ‘타투’다.
타투는 잉크를 묻힌 바늘을 기계나 작업자가 수작업을 통해 피부에 어떠한 도상을 남기는 작업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의사를 제외하고는 타투 시술이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는데다, 타투는 조폭이나 불량배같은 사람들이나 받는다는 인식이 강해 사회 전반적으로 음지의 문화로 분류된다.
사전에서 도출한 위의 두 가지 척도에 따르면, ‘타투’ 또한 서브컬처의 기준에 부합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구 전체로 봤을 때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타투를 받고 있고, 또한 극히 일부는 특정 타투이스트에 열광하는 등 ‘매니아성’을 띠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가지 점을 비추어보았을 때 타투는 서브컬처의 정의에 부합한다.
그렇다면 타투는 정말로 서브컬처인가?
서브컬처의 사전적 정의에 따라 타투가 서브컬처가 맞다면, 기존에 오타쿠 문화를 설명하던 서브컬처라는 용어는 그 근간이 흔들리게 된다.
재패니메이션 콘텐츠(만화, 라이트 노벨, Jpop 등)를 좋아해 서브컬처(?)에 푹 빠지게 된 사람들은 서브컬처가 곧 오타쿠 문화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타투가 사전적 정의에 따라 서브컬처가 맞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오타쿠 문화가 곧 서브컬처라고 생각하는 인식은 곧 서브컬처라는 용어를 엉뚱하게 사용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서브컬처라는 용어가 오타쿠 문화를 지칭하는 데 과연 적절한가를 판단하기에 앞서 이러한 ‘반례’를 미리 정리 및 재반박해보는 과정은 중요하다.
만약 타투가 서브컬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우리는 그 증명의 과정으로부터 무엇이 서브컬처이고 아닌지 서브컬처의 분류를 조금 더 엄밀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례를 쌓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는 서브컬처라는 용어가 그 반례[타투]를 ‘포용할 수 있을지’ 아니면 과감히 ‘포기’해야하는지에 대해 고찰해보도록 하자.
타투와 서브컬처
타투, 조금씩 음지에서 양지로
최근 거리를 걷다보면 팔이나 다리, 배 등 자신의 신체 곳곳에 ‘타투’를 가진 사람을 흔히 접할 수 있다.
패션업계는 물론이고, 사람을 접대하는 서비스업이나 게임업계 등에서도 타투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만해도 타투는 무서운 눈매의 조폭들이 등 뒤에 커다랗게 새기는 두려움의 상징 그 자체였다.
오죽하면 다른 사람과 시비가 붙으면 타투를 가진 사람이 앞으로 나서라는 우스갯소리도 도시전설처럼 공공연하게 퍼져있을 정도였다.
지금도 타투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때의 타투와 지금의 타투는 사실 꽤 많은 차이가 있다.
정확히는 타투를 받는 성별도, 연령층도, 그리고 그 크기와 범위, 목적도 모두 더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더 다양해지고 캐주얼하게 변했다.
과격해보이는 남성의 전유물같았던 타투는 이제 여성에게도 흔히 볼 수 있고, 연령층도 2, 30대에서 낯설지 않다.
타투를 받는 사람도 달라졌지만, 타투 시술 받는 소재도 다양해졌다.
물론 팔이나 등에 커다란 호랑이나 용, 해골 등을 그리는 것은 여전하다.
일본 야쿠자를 연상시키는, 소위 말하는 조폭 타투(이레즈미)도 여전히 건재하다.
하지만 주위에 타투를 받은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이나 소녀, 명화,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 소재와 스타일이 굉장히 다양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국내에서 타투 시술은 기본적으로 불법이다.
타투를 받는 것은 의료 행위로 구분되며, 의사에게만 합법적인 타투 시술 권리가 주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타투는 사실상 ‘불법 작업물’이다.
타투 자체가 불법이다보니, 타투이스트들은 법적 사각지대에서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채 시술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타투이스트 중에서 제대로 된 전문성을 갖춘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저작권(?)에 대한 우려가 들 정도로 정밀하게 묘사된 타투가 있는가하면, 대체 뭘 그리려고 한 건지 전혀 의도조차 알 수 없는 지저분하고 그로테스크한 타투도 많다.
하지만 산업의 크기가 점차 커지면서, 타투를 바라보는 시각도 점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투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 움직이자 눈치빠른 정치인 일부도 함께 움직였다.
특정 정당에서는 몇 년 전 ‘타투 합법화’라는 논쟁적 주제를 꺼내들었다. 물론 이 법안은 결국 사장되었지만, 이제는 정치권에서도 타투를 받는 사람들이나 시술하는 사람들에 대해 예전에 비해 조금 더 신경쓰는 것처럼 보인다.
타투는 여전히 ‘음지 문화’이다.
하지만 어쩌면 10년, 아니 5년 내에 타투를 바라보는 세간의 인식은 생각보다 빠르게 바뀔지도 모른다.
고대와 현대의 타투
사실 타투는 굉장히 오래 전, 말하자면 기원전부터 존재해왔던 문화이다.
최초의 타투는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 기원전 3,300년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 미라로부터 발견되었다. 그 미라의 신체 곳곳에는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어떠한 시각적 심볼들이 있었는데, 학자들은 그 점과 선이 주술적 혹은 치료적 목적으로 시술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4대 문명 중 하나인 고대 이집트에서도 타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미라에 새겨지는 타투는 신이나 상징적인 동물들을 묘사한 경우가 많았으며, 사회 하층민보다는 그 당시의 중요 인물들에게나 허용되는 ‘귀한 신분’의 상징으로서 시술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고대의 타투는 사회적 신분, 성년의례, 치료, 출산 등 다양한 주술적 목적 등을 위해 시행되던 일종의 ‘의식’이었다.
로마 시대에는 검투사들에게나 발견할 수 있는 등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는 존재들에게 ‘낙인’찍히듯 부여되던 징표라는 인식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고대 문명에 발견되는 타투는 분명 지금의 타투와는 세간의 인식이 달랐던 것 같다.
만약 5000년 전 어떤 원주민 부락에 살고 있었다면, 성년이 되거나 2차 성징이 드러나던 시기에 부족장이나 주술사에 의해서 타투를 받고 뛸듯이 기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타투의 인식은 어떤가. 간단하다.
상상해보자. 만약 내가 타투를 받고 집에 들어온다면 부모님이 나를 대견스러워할지, 아니면 불편한 눈으로 바라볼지 말이다. (물론 가정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은 감안해주었으면 한다.)
타투를 국가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폴리네시아를 비롯해, 우리가 모르는 어떤 미지의 문화권에서는 여전히 주술적 목적으로 타투를 시술하는 곳도 있겠지만, 지금 사회에서 타투를 받는 사람의 90% 이상은 아마도 패션을 목적으로 시술받고 있을 것이다.
똑같은 타투라고 해도, 그때와 지금 타투를 받는 이유는 완전히 달라진 셈이다.
타투는 서브컬처인가?
타투를 받는 이유는 물론이고, 타투를 바라보는 인식 또한 그때와 지금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정리해보자.
- 고대 사회에서의 타투는 서브컬처의 정의에 부합하는가?
- 현대 사회에서의 타투는 서브컬처의 정의에 부합하는가?
하나의 소재(타투)를 두고 이렇게 시간에 따라 쪼갠 이유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여기서 말하는 고대 사회는 기본적으로 수렵채집사회이다. 부족사회로 이해해도 좋다. 가령 ‘곰 부족’, ‘호랑이 부족’ 등,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으로 알려진 무형의 상징물을 숭배하던 시대이다.
수렵채집사회에서 인간은 비옥한 땅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했다. 비옥한 토지를 찾아 정착하고 군락을 이루어 사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계절이나 토양의 비옥도 등에 따라서 정착하던 군락을 버리고 수렵과 채집을 이어가던 문화권도 존재했을 것이다. 이러한 수렵채집사회는 본격적으로 농경사회에 진입하기 전까지 굉장히 긴 시간동안 인류 문명사의 앞장을 차지했다.
이런 사회에서 타투는 주술사가 직접 내려주는 ‘신성한 증표’였을 것이며, 이것을 받는 것은 특정 부족민에게 국한되지 않고 그 기회가 고르게 부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소수(만이 향유하는)문화라고 하기에는 고대의 타투는 아마 그런 개념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타투를 받는 자가 그 부족의 남성 대표나 여성 대표에 한해 시술되었다하더라도, 이것을 받는 자가 자신이 스스로 원해서 (패션 목적 등) 받는 것이 아니라 부족을 대표하거나 어떠한 주술적인 목적(수렵 성공, 다산 등)에 따라서 받았을 것이므로‘매니아성’ 척도로 판단하기 어렵다.
따라서 고대 사회에서 타투는,
소수문화도 매니아적인 문화도 아니었으므로 서브컬처가 아니다.
반면 현대 사회는 어떨까?
이미 앞서 타투가 서브컬처의 두 가지 척도에 부합한다고 설명했지만, 정말로 두 척도에 부합하는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보도록 하자.
이 지구에는 70억에서 80억에 달하는 인간이 살아가고 있으며, 그중에서 타투를 몇 명이 받았는지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다만 서양권 국가가 동양권보다는 대체로 타투 시술이 합법이라는 점, 그리고 미국에서는 성인 인구의 최대 2-40%의 사람이 타투를 시술받았다는 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적어도 10% 이상의 인류는 최소 1개의 타투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과 유럽 등 서구권에서는 타투를 1개 이상 가진 사람 비율이 적지 않지만,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타투 시술 비율이 0%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특정 문화권에서는 적지 않은 수가 향유하는 문화(타투)를, 또다른 문화권에서는 극히 소수만 타투를 가진 것을 두고 소수문화라고 결론내릴 수 있을까?
애초에 소수문화라는 기준은 어떻게 세워지는 걸까?
소수냐 아니냐를 판가름할 때 주의해야할 게 바로 ‘수치의 함정’이다.
예를 들어, 10%라는 수치는 소수인가? 그렇다면 20%, 30%는 어떤가. 분명 10%보다는 많지만, 30%쯤 되면 단순히 소수의 문화라고 치부하기에는 볼륨이 크다. 이 숫자를 40%, 나아가 49%라고 하면 인류의 절반 가까이가 향유하는 문화를 소수문화라고 말해버리는 우를 저지르기 쉽다.
따라서 소수라는 기준은 ‘수치 비율’을 기준으로 매기기 어렵다.
이럴 때 우리가 세울 수 있는 기준은 바로 그 문화권에서 이미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문화 요소가 있는가를 찾으면 된다.
예를 들어, 중국은 수십 개의 민족이 섞인 다민족국가이다. 티베트인도 넓은 범위에서는 중국인이고 적지 않은 수를 차지하지만, 중국 내 ‘한족’에 비해서는 명백히 소수를 차지한다.
만약 우리가 타투를 ‘소수문화’라고 판단하려면, 그 사회문화권에 ‘타투를 받지 않는’ 문화가 우위를 점하고 있으면 충분히 소수문화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아까 얘기로 돌아와 보자. 미국에서는 성인 기준 인구의 최대 40%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타투가, 사우디아라비아 등 일부 국가에서는 0%에 수렴하는 현상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미국은 이미 타투가 주류문화(메인스트림)까지는 아니지만 소수문화라고 하기에 애매한 상태이다. 따라서 미국을 두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반면, 사우디아라비아처럼 타투 받는 인구가 0에 수렴하는 사회에서 타투는 명백히 소수문화일 것이다.
이런 문화권에서는 타투를 가진 사람들끼리 긴밀하게 커뮤니케이션하거나 은밀한 곳에서 집단적 결속감과 고유한 정체성을 갖고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앞서 서브컬처의 두 가지 척도 – 소집단의 문화(소수문화)와 매니아성 – 을 두고 특정 문화가 서브컬처인지 판단하려고 했다.
그런데 서브컬처의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하위문화의 가장 주요한 기능은 그 구성원들에게 집단적 결속감과 고유한 정체성을 제공해주는 것이며 이러한 특질은 서브컬처의 주체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현재까지의 정리에 따르면 미국에서 타투는 집단적 결속감과 고유한 정체성이라기보다는 개인의 패션을 위해 시술받는 경우가 다분하므로 서브컬처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슬람권에서는 타투가 서브컬처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타투는,
특정 문화권에 따라 ‘상대적‘이므로 서브컬처 여부를 판가름하기가 어렵다.
지금까지의 결론
- 소결론: 어떤 문화콘텐츠가 서브컬처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상대적’이다.
- 기준:
- 국가, 민족, 종교
- 시간(고대, 현대 등), 지리(미국 서부, 미국 동부, 하와이 제도 등)
- 타투는 서브컬처인가?
- 타투는 서브컬처가 아니다. (두 가지 척도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Cultural C(Change) & C(Context)
필자는 타투가 서브컬처인지 정의하려는 시도로 ‘소수 문화’와 ‘매니아성’이라는 두 가지 척도만으로 타투를 판단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론은 ‘타투는 서브컬처가 아니다.’라는 결론이 났다.
문화를 바라보는 시간(고대와 현대), 그리고 공간(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상대성’ 때문이다.
문화는 시간이 흐르며 바뀐다.(change)
문화는 그 문화가 뿌리내린 지역, 정치, 종교, 인종 등 다양한 맥락(context)에 의해 재정의된다.
이를 사전에서는 ‘문화 변동(Cultural Change)’과 ‘문화적 맥락(Cultural Context)’이라고 정의한다.
문화 변동 (Cultural Change)
문화 변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 사회의 문화 요소나 패턴이 변화하는 현상이다. 이러한 변화는 기술 발전, 외부 문화와의 접촉, 환경 변화, 사회적 갈등, 법 제도의 변화 등에 의해 촉진된다.
문화 변동은 대표적으로 아래와 같은 양상을 띤다.
- 혁신: 새로운 기술이나 아이디어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문화적 요소가 변형되거나 대체된다.
- 문화 확산: 한 사회에서 발전한 문화적 요소가 다른 사회로 퍼져간다.
- 문화 융합: 서로 다른 사회나 문화로부터 문화 요소가 서로 합쳐지거나 새로운 문화를 낳는다.
- 문화 저항: 서로 다른 사회나 문화로부터 문화 요소가 서로 융합을 거부하고 변화에 대한 저항하거나 전통을 지키려는 움직임을 띤다.
지역 문화는 기본적으로 관습적(conventional)이므로, 기존 문화는 새로운 문화에 저항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세계화(globalization) 추세는 저항할 수 없는 흐름이며, 이것이 각 지역(local)에 받아들여지면서 새로운 문화양식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서울 한복판에서 ‘터키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원료는 터키가 아니라 한국이라든지 그 지역의 로컬 식재료가 활용된다. 우리의 식탁에는 유럽의 멸균우유가 오르고, 세계인들은 한국에서 ‘밥버거’를 먹는다.
이를 세계화와 지역 문화가 융합되었다고 하여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 global + localization)이라고도 부른다.
문화적 맥락 (Cultural Context)
문화적 맥락은 개인이나 집단의 행동, 생각, 상호작용이 형성되고 해석되는 문화적 배경을 말한다. 쉽게 말해, 그 사회가 가진 문화적 관습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한국 이름을 받고, 한국어를 익히며, 한글을 공부한다. 한민족이 다수인 한국인 사회의 가치관과 규범을 익히며, 남자의 경우에는 20세 즈음에 한국법이 규정한 대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군대에 입대한다.
이러한 문화적 맥락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가치관: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믿음과 이념.
- 규범: 사회 구성원들이 따라야 할 행동 규칙이나 기대.
- 상징: 특정 사회에서 의미를 가진 어떠한 행동 양식이나 기호. 예를 들어 ‘태극기’.
- 전통: 과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행동 양식이나 믿음. 예를 들어 ‘설’이나 ‘추석’ 명절.
문화적 맥락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채 어떤 공동체 문화에 섞여들어갔다간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젊은층에서는 ‘집게손가락’을 하거나 특정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했다가는 주위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을 수 있다. 동일한 제스처를 다른 사회(유럽, 미국 등)에서 한다면 문제가 없더라도, 한국에서는 유난히 무례한 행위로 여겨질 수 있다.
한국인은 오랫동안 ‘단일민족’이라는 한민족 고유성에 관한 정체성 교육을 받아왔다. 이런 사회에 어느 순간부터 ‘이슬람’, ‘탈북민’, 동남아시아권 ‘외국인 노동자’를 비롯해 소수 민족과 문화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형성하는 소집단의 문화는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놀랍게도, 한국은 인구의 약 5%가 외국인 출신 이민자일 정도로 다문화국가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언젠가 이들이 한국의 주요 요직(기업 총수, 정치인, 고위 공무원 등)을 맡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아직 이들은 한국에서는 ‘서브컬처’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유행하지 않는 상태 = 서브컬처?
우리는 앞서 서브컬처가 시간 및 공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결론을 냈다.
이 결론에 뒷받침이 될 수 있는 근거로 문화 변동과 문화적 맥락이라는 개념을 가져와, 문화(및 콘텐츠)는 시간의 흐름과 공간적 차이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논의의 흐름에 따르면, 서브컬처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대적일 것이라는 논리에 힘이 실리는 듯하다.
한국에서 한때 열풍이었던 대만 카스테라 열풍을 예로 들어보자.
처음에는 아는 사람만 아는 음식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브컬처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순간 우후죽순처럼 매장이 늘어나며 언론에서도 다룰 만큼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유해성 논란이 불거졌다. 전국적으로 수백에서 수천에 달하는 매장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 유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매스컴을 탈 정도로 ‘주류문화’처럼 느껴지던 것이, 한 순간의 계기로 순식간에 유행이 사그라들어버린 것이다.
여전히 대만 카스테라를 취급하는 점포는 있겠지만 지금은 먹는 사람만 먹는 완전한 ‘소수 문화’가 되었다.
이러한 예시에 따르면, 마치 서브컬처는 ‘유행하지 않는 상태’를 두고 서브컬처라고 일컫는 듯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게임으로 빗대자면, 유행하는 게임(메이플스토리 등)은 메인스토림이 되고, 유행하지 않는 게임(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인디게임 등)은 서브컬처가 되는 것일까?
옛날에 한창 인기를 끌었던 ‘겟앰프드’나 ‘포트리스’가 지금은 서브컬처라고 불린다면, 결국 사람들이 지금 좋아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는 ‘유행’과 서브컬처가 사실상 다를 바가 무엇일까?
서브컬처라는 용어는 여기저기에서 마치 카멜레온처럼 정체를 바꿔가며 각 지면마다 새롭게 정의되어 온 게 아닐까.
서브컬처라는 용어가 이처럼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예민하게 변용되며 규정된다면, 이 용어는 사실상 ‘유행’이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서브컬처’라고 불릴 만한 것들은 없을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어떤 문화권에서도, 또는 일부 문화권에서는 주류 문화일지언정 전세계 공통 상식 선에서는 서브컬처로 취급될 만한 것들은 없을까?
그렇다면 이제는 누군가에게는 더 민감하게 느껴질 수 있는 주제를 다뤄보도록 하자.
이번에 얘기해볼 주제는 바로 ‘종교’다.
정말로 서브컬처는 ‘상대적’인가?
서브컬처는 주류 문화와 구별되는 특정 소수 집단의 독특한 규범, 가치, 미학을 지칭하는 개념으로서 주류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
그리고 문화 변동과 문화적 맥락에 따라 서브컬처 꼬리표는 상대적으로 매겨질 수 있다.
그러나, 서브컬처의 모든 요소가 상대적으로 결정된다는 결론에 다다르는 순간 어쩌면 서브컬처라는 용어는 유행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는 어떨까? 우리는 종교도 서브컬처 여부의 잣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만약 종교 중 하나라도 ‘서브컬처’가 있다면, 종교는 유행과는 무관하니 서브컬처라는 용어가 유행과는 다른 용어라는 하나의 반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기독교’나 ‘가톨릭’, ‘불교’ 등은 유행는 거리가 먼 문화 요소들이다.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나 ‘힌두교’ 등,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하지만 특정 문화권에서는 그 국가의 국교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미치는 종교가 있다면 이는 서브컬처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두 가지 종교를 생각해봤다. 하나는 우리나라에서는 극소수만 믿지만 특정 문화권에서는 다수가 믿는 ‘이슬람교’를, 그리고 또 하나는 국내에 과연 신도가 있기는 할지 모르는 ‘조로아스터교’이다.
이슬람교의 경우
우리가 사우디아라비아의 공항에 서 있다고 상상해보자.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교 신자가 92%에 달하는, 대표적인 단일종교국가이다.
이란의 경우에는 국교 자체가 ‘시아파 이슬람’이며, 이슬람교 신도가 99% 이상을 차지한다.
이슬람교를 믿는 신자는 전 세계적으로 20억 명에 육박한다. 게다가 종교라는 건 시간이 흘러도 마치 유행이 변하듯이 수 개월이나 수 년 내에 급격히 신도 수가 변하거나 그 영향력이 급증, 급감하지 않을 것이다.
이슬람교가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 같은 나라에서는 주류 문화로 자리 잡고 있지만, 서구권이나 비이슬람권 국가에서는 소수 집단이 공유하는 문화적 요소로 인식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서브컬처라는 개념이 상대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의 전반적인 영향력과 역사적 맥락을 고려했을 때 서브컬처로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편, 서울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한국에서 가장 이슬람권 사람을 만나기 쉬운 곳은 아마 ‘인천공항’일 것이다. 외국인이 많이 찾는 거리인 강남, 홍대, 광화문, 압구정 등이 아니라면 서울에서 이슬람권 사람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에서는 아마 흔히 볼 수 있는 사원(모스크)도 서울에서는 굉장히 찾기 어려울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밈’ 개념에 따르면, 문화적 요소는 개별적인 사람들이 그 문화를 흡수하고 전달하는 과정을 통해 퍼진다. 이슬람교의 특정 의식이나 의복 규정은 이런 밈으로서 다른 문화권에 전파되며, 그 결과 특정 문화권 내에서는 서브컬처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서울에서 이슬람교는 주류 문화에 비해 명백히 소수에 해당한다. 이는 신자 수나 종교적 활동이 적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슬람교가 가진 독특한 규범과 관습—예를 들어 기도, 의복 규정, 음식법—이 한국의 주류 문화와 상충되거나 잘 섞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서브컬처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슬람교의 특정 의식(메카를 향해 절하는 것)이나 의복 규정은 이슬람교가 아닌 사람들도 익히 알고 있을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흔히 알려진 관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이 비록 그 사회에서 비주류일지언정, 그러한 문화가 그들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문화가 아니라 공공연하게 잘 알려져있다.
결국, 서브컬처는 특정 문화권 내에서 주류에 대한 상대적 위치에 의해 정의되며, 이슬람교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과 같은 국가에서 주류 문화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서브컬처로 간주될 수 없다. 또한, 세계적으로도 이슬람교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요 종교이므로 단순히 소수 문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론적으로, 서브컬처는 문화적 맥락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의되지만, 이슬람교는 전 세계적으로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주요 종교이기 때문에 서브컬처로 간주할 수 없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우
전세계에서 약 10만 명 정도의 신도를 보유한 ‘조로아스터교’.
이 생소한 종교는 지역을 막론하고 어느 곳을 가더라도 ‘서브컬처’라고 취급받을 만큼 약소한 위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조로아스터교도 한때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현재의 이란과 그 일대에 서기 224년부터 약 400여 년간 존속했던 ‘사산 왕조’가 등장하고 국교로 인정받았을 때다.
이때 조로아스터교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형성과 함께 불교를 밀어낼 정도로 성장한다. 불교 이후에도 마니교나 마즈다크교 등이 등장하며 국교를 위협하기도 했지만 결국 조로아스터교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몰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영광은 영원히 가지 못했다. 조로아스터교는 ‘국교’였기에, 사산 왕조라는 국가가 몰락하면서 조로아스터교의 황금기도 마침내 종언을 맞이하고야 만 것이다.
사산 왕조 멸망 이후 이슬람 세력권이 점차 강성해지자, 조로아스터교 세력권은 계속 줄어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조로아스터교는 단일신교로서 다른 종교의 신을 부정하고 있으며, 이는 동일한 세력권 내의 이슬람교와 상종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미 예언자 무함마드 때부터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교의 사이는 좋지 않았는데, 무슬림들의 세력이 커지자 점차 조로아스터교는 이단으로 취급되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고작 약 10만 명만이 이 종교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불을 섬긴다’는 의미로 배화교라고 불리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예로부터 불은 신의 힘을 담고 있는 강렬한 의지나 신화적으로도 해석되는 상징처럼 여겨졌다. 이는 비단 조로아스터교뿐만이 아니라 그리스 로마 신화의 ‘프로메테우스 신화’나 그밖에 다른 신화나 전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제는 ‘불을 섬기는 종교 의례’는 전 세계적으로는 꽤 소수의 문화가 되었다. 크리스트교는 물론이고, 불교나 이슬람교에서도 불을 이용한 의례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가정집에서 가스레인지를 켜기만 해도 불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현대 사회이다. 다시 말해, 현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불을 신성한 상징으로 여기지 않는다. 과학의 발전에 따라, 불이나 번개가 더 이상 신의 힘이 아니라 이 자연계의 자연스러운 현상임이 밝혀진 탓이다. 현대 사회에서 불을 숭상한다는 건 마치 현대에 ‘번개교’라는 이름을 가진 종교의 신도들이 번개를 숭배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실제로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나 그에 준하는 종교로 택한 곳은 전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으며, 그나마 조로아스터교 신도들도 이란보다는 인도나 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 얹혀사는 신세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세계 어디에서도 ‘소수 문화’에 해당하는 약소한 문화집단이 된 것이다.
물론 10만 명의 신도가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다. 하지만 억 단위의 신도를 보유한 특정 종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이 종교 집단은 충분히 ‘소집단’이고, 어느 지역에 가더라도 해당 주류 문화(메인스트림) 내에서 서브컬처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전 세계적으로 ‘소집단의 문화’라는 점, 그리고 그들만의 문화적 양식(불을 숭상한다는 점)을 보았을 때 다분히 서브컬처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있다.
그런데 조로아스터교에서 생각해볼만한 점은 이게 끝이 아니다. 종교의 근원지인 이란은 국교가 ‘시아파 이슬람’이고, 이슬람교 신도가 99%에 달한다. 바로 이 이란에서 ‘조로아스터교’를 믿는다는 건 주류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까?
대한민국은 종교적 자유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나라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 불교, 그밖에 수많은 어떠한 종교를 길가에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란에서 조로아스터교를 믿는다는 건 사뭇 다른 모습일 것이다. 이란 헌법에서도 조로아스터교뿐만이 아니라 기독교나 유대교도 종교로 믿을 수 있음을 인정해주고 있지만, 조로아스터교를 믿는다는건 이란에서 다양한 박해와 핍박을 견디어내야한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강요당하는 등의 직접적인 차별이 존재하고 있으며, 특정 일자리를 갖는 데 제약이 생기거나 세금을 더 많이 내야하는 등의 사회간접적인 차별요소가 존재한다.
어쩌면 이란 주류 사회에서는 조로아스터교 그 자체를 주류 사회에 도전할 수 있는 잠재적인 적(경쟁자)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란 사람들에게는 조로아스터교를 믿는다는 것만으로도 ‘반문화(Counterculture)’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을까?
반문화(Counterculture)와 서브컬처
반문화(Counterculture)는 특정 사회의 주류 문화나 가치관에 반대하거나 도전하는, 일종의 저항의 문화다.
반문화는 특정 국가뿐만이아니라 종교나 사회, 신념, 가치관 등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이러한 반문화의 뿌리에는 ‘저항의식’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릴 적부터 특정 나이가 되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에 가는 걸 자연스러운 청소년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트랙’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등교를 거부하거나 자퇴하거나 또는 대안학교의 교육이 더 나은 삶을 가져다 줄거라고 믿는다. 이러한 개인의 믿음과 신념은 때로 주류 문화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사회 시스템은 이들을 ‘이단’, ‘별종’, ‘사회부적응자’, ‘히키코모리’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란에서 조로아스터교나 기독교, 유대교를 믿는다는 것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주류 사회가 구축해놓은 이슬람교 특유의 관습과 가치관을 부정해야만 한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에서 메카를 향해 절을 해야한다는 관습에 관해,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가정에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모두가 Yes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당당하게 No를 주장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모두가 쉬쉬하는 사회에서 진실을 폭로하는 것도, 주류 사회에서 긍정하는 가치관을 나홀로 부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반문화’는 해당 사회를 혼란에 빠트릴 수도 있어서 법적으로 또는 사회관습적으로 탄압된다.
그렇다면 반문화는 무조건 나쁜 걸까?
히키코모리가 없었다면 오타쿠 문화가 생겨날 수 있었을까?
검열이 없었다면 검열에 맞서 싸우려는 집단적인 움직임이 있을 수 있었을까?
정치, 사회, 종교, 문화적 핍박이 없었다면, 그러한 주류 문화가 규정한 것이 틀렸다고 감히 나설 수 있는 용기가 있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이 어떠한 ‘개체’로써 탈바꿈할 때 그 현장에서 예술이 피어난다.
반문화의 이러한 ‘저항문화’적인 성격은 어쩌면 서브컬처가 가진 본질에 맞닿아있을 수도 있다.
서브컬처의 정의가 규정하는 ‘소집단의 문화’와 ‘특정 규범과 양식’ 등이, 반문화의 특징에도 맞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문화’ 내지는 ‘저항문화’라는 용어는 무언가 과격한 느낌을 준다. 마치 사회 ‘혁명’이나 ‘시위’, ‘범죄’와도 같은 어떠한 저항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가?
그래서 필자는 반문화, 그리고 저항문화라는 용어를 이렇게 재정의하고자 한다.
반문화(저항문화)란, 그 주류사회가 권장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으로부터 자유롭거나 그것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의미한다. 주류사회는 그러한 움직임에 대해 관습적이거나 법적으로 제약하기도 하며, 이러한 집단의 크기가 커지는 것을 경계한다. 단, 이러한 주류사회의 움직임에 대해 비폭력, 비저항의 태도를 견지한 채 그들 스스로가 가진 정체성(사회가 규정하는 금기)이 어떠한 문화를 낳는다면 이것은 단순한 사회 ‘저항’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반문화는 곧 그 사회가 규정한 ‘금기(터부)’를 의미한다.
만약 위 정리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서브컬처의 정의를 이렇게 확장시켜볼 수 있다.
- (기존) 척도 1: 서브컬처는 소집단의 문화이다.
- (기존) 척도 2: 서브컬처는 매니악한 문화이다.
- (추가) 척도 3: 서브컬처는 터부시되는 문화이다.
정리하는 글
새롭게 정의내린 서브컬처의 척도에 따라 우리가 이번 글에서 정리한 것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 타투: 척도 3에 해당 (국내에서 타투 시술은 불법이기 때문에 탄압받는 문화이다)
- 대만 카스테라: 서브컬처가 아님 (한 철의 유행’Pad’에 해당)
- 이슬람교: 서브컬처가 아님 (특정 척도에 해당하지 않음)
- 조로아스터교: 척도 1, 척도 3에 해당 (신도 수가 적으며, 이란 등에서는 탄압받는 종교임)
- 사타니즘: 척도 1, 척도 3에 해당 (이 가치관에 동의하는 자가 소수이며,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긍정적으로 비춰지지 않는 개념임)
앞서 타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상대적’이기 때문에 서브컬처로 취급하기 애매하다고 평했다. 하지만 타투 시술 자체가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만큼, 이제 타투는 확실하게 ‘금시(터부)시’되는 문화로 볼 수 있어서 서브컬처에 해당한다.
대만 카스테라는 단순 유행에 따른 사례이므로 서브컬처가 아니다.
이슬람교 또한 일부 반례(국내에는 신도가 적다든지 등)가 있다고는 하나 일반적으로 서브컬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로아스터교와 사타니즘은 각각 그 가치관을 신봉하는 자의 수가 적은데다, 대다수의 문화권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주류 사회에서 터부시되는 만큼, 서브컬처적이라고 보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이번 글에서 타투가 ‘서브컬처’라는 결론을 냈다.
그렇다면 ‘성(sex)’는 어떨까?
우리는 ‘성 문화(sexual culture)’에 대해 서브컬처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까?
다음 글에서는 ‘섹슈얼 콘텐츠(sexual contents)’를 통해 서브컬처 담론을 조금 더 확장시켜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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