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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목표」를 잘 설계한 5가지 게임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게임 디자인 방향잡기』

들어가는 글

경험 목표 첫 이미지
완전한 백지. 무한한 가능성, 그리고 스멀스멀 적셔오는 공포.
Image by rawpixel.com on Freepik

“이제 뭐부터 해야하지?”

‘머리속이 완전히 백지가 되었다’는 관용어가 있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가 무한하다면, 오히려 더 막막해진다.

게임개발도 마찬가지다. ‘모든 게 가능하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모든 게 막막하다’는 말과 다름없다.

‘이런 게임을 만들고 싶다’와 같은 최소한의 방향성조차 없다면 상황은 더 절망적이다.

개발자는 나침반도 없이 바다 위의 돛단배에 둥둥 떠 있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백지상태’의 크레바스에 빠지면 개발자는 끊임없이 고통받는다.

주어진 기간은 줄어들어만 가는데, 개발의 방향성은 중구난방으로 뻗어나가다가 결국 산으로 가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시간만 충분하다면 이 문제는 해결될까?

1년동안 주 52시간으로 매 주 크런치 기간으로 이 ‘낭비한 시간’을 따라잡는다고 해도 좋은 게임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명확한 ‘경험 목표’ 없이 개발을 했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경험 목표’는 우리 모두가 더 재밌고 확실한 개발을 하기 위해, 크런치를 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경험 목표의 정의


“<클라우드> 개발을 시작했을 때 우리의 혁신 디자인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맑고 화창한 날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가로지르는 구름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편안함과 기쁨을 어떻게든 재현해 보자는 것이었다.”

트레이시 풀러턴, ‘게임 디자인 워크샵’

경험 목표란,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경험하게 할’ 목표다.

게임 개발자는 자신의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를 위해 게임을 개발한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왜 플레이할까? 그건 게임 플레이에서 어떠한 즐거움(좋은 경험)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플레이어가 ‘왜’ 자신이 만든 게임을 플레이하게 할지 게임 개발자는 플레이 목적을 설계하는 게 중요하다.

RPG 게임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해보자.

똑같은 RPG 장르라고 해도, 게임마다 플레이어가 경험하는 게임 플레이는 크게 다를 수 있다.

마법과 액션이 살아 숨쉬는 게임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하지만 재미는 이것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장’과 ‘육성’의 재미가 뛰어난 RPG가 있는가하면, ‘전략성’이나 ‘묘수풀이’의 재미를 중시한 RPG도 있을 수 있다.

필자처럼 욕심 많은 게임 개발자는 위의 모든 경험 요소에서 재미를 주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게임의 정체성이 모호해지기도 쉽고, 게임의 차별화된 재미를 발굴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그래서 ‘경험 목표’를 정하는 게 필요하다.

다시 ‘MDA 프레임워크’


(링크)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MDA 프레임워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MDA 프레임워크란, ‘지금 제작하는 게임의 재미가 어디서 올까?’를 설명하기 위한 게임 디자인 방법론이다.

MDA 프레임워크의 핵심은 개발자는 게임 개발 시 메카닉스를 우선해 개발하는 경향이 있고, 플레이어는 게임 플레이 시 미학(A)을 우선 경험한다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발자는 플레이어가 경험할 A를 우선적으로 고려해 플레이어 경험과 게임 디자인 사이의 괴리를 줄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게임 개발이 산으로 가기 쉽다.)

MDA 프레임워크에 따르면, 경험 목표를 설계한다는 건 곧 플레이어가 경험하게 할 미학(Aesthetics)적 요소를 결정한다는 말과 같다.

정리하자면, ‘경험 목표’는 우리 게임의 핵심 ‘미학’을 결정하게 한다는 말과 같다.

  • 너티 독의 ‘언차티드’. 닌텐도 ‘젤다의 전설’의 핵심 미학은 ‘미지에 대한 탐험’이다.
  • 심즈 시리즈의 핵심 미학은 ‘유대감(Fellowship)’, 소울라이크의 핵심 미학은 ‘도전(Challenge)’이다.

이러한 핵심 미학은 또다른 미학적 요소와 결합하여 그 게임만의 독특한 색깔이 나게 만든다.

그리고 미학이 결정됨으로써 그 다음 단계인 동역학(Dynamics)을 설계하기도 수월해진다.

‘경험 목표’ 설정은 게임 디자인 단계 중 ‘아이디에이션 –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 MDA 프레임워크와 함께 고민하면 좋다.

마사지 프릭스 표지
미소녀의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게임, ‘Beat Refle’는 ‘미소녀에게 마사지를 하자!’는 경험 목표를 미학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리듬 게임 방식의 플레이가 D(Dynamics;동역학)가 작동하게 한다.

경험 목표 예시 – ‘언차티드’


너티 독 언차티드 시리즈의 게임 디자이너, 리처드 드마샹은 그의 저서 ‘A Playful Production Process: For Game Designers and Everyone'(국내본: 재미있는 게임 제작 프로세스)에 언차티드 프로젝트에서 ‘경험 목표’를 기획했던 일화를 소개한다.

아래는 실제로 언차티드 시리즈. 경험 목표로 사용하기 위해 기록한 내용을 번역한 것이다. 아래 내용을 읽어보면 ‘경험 목표’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가져와보았다. (번역문은 국내 번역본 기준)

아래의 규칙들은 개발자들이 언차티드 시리즈를 개발하는 동안 방향을 유지하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 액션이 가득하고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 지나치게 복잡한 퍼즐이나 번거로운 게임 플레이 메커닉으로 액션 속도를 너무 늦추지 않으며… 항상 템포를 빠르고 재미있게 유지한다.
  2. <언차티드>는 너무 진지하지 않다.
    • 서스펜스, 미스터리, 드라마 요소를 결합하지만 “펄프 액션”적인 재미도 놓치지 않는다. 때때로 긴장감을 깨기 위한 기발한 위트나 우스꽝스러운 곤경에 빠지는 것은 <언차티드> 시리즈 고유의 특징 중 큰 부분을 차지한다.
  3. 드레이크는 실수투성이 인간이다.
    • 드레이크는 제임스 본드가 아니다. 그는 결코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며, 항상 즉흥적으로 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애쓴다. 그는 특별한 힘을 얻거나 슈퍼맨이 되는 대신, 항상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넘나들며 활약한다.
  4. 잃어버린 신기한 장소를 발견한다.
    • 우리는 모험의 대부분을 인적이 드물고 시간이 흘러 잊혀진 “미지의” 장소를 탐험하는 데 보내기를 원한다. 드레이크는 일종의 탐정으로, 사건의 조각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5. <언차티드>의 세계에는 그럴 듯한 초자연적 요소가 있다.
    •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요소가 존재하지만 드레이크는 항상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언차티드의 초자연적 요소는 “미이라/고스트버스터즈”보다는 “엑스파일/28일 후”에 더 가깝다.
  6. 익숙한 배경에 낯선 것들이 있다.
    • 스토리부터 환경까지 모든 것이 어느 정도 실제 역사적, 시각적 신빙성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믿을 수 있는 토대가 탄탄하게 구축되면, ‘환상적인’ 층을 추가했을 때 훨씬 더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경험 목표 예시 – ‘라스트 오브 어스’, ‘워킹데드’


  • 선택지 1: 권총을 발사한다.
  • 선택지 2: 권총을 발사하지 않는다.
인류의 미래 vs 한 소녀의 목숨. 트롤리 딜레마의 문제를 꺼내든 그 유명한 ‘The Last Of Us’의 라스트 씬

너티 독의 또 다른 게임 ‘더 라스트 오브 어스(The Last Of Us)’에서는 마지막 장면에서 플레이어가 권총을 발사할 지 말 지 결정해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엔딩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분기적 요소는 아니지만, 플레이어는 분기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장면에 완전히 ‘몰입’하여 자신의 입장에서 방아쇠를 당길 지 선택하게 된다.

더 워킹 데드 시리즈 최고의 장면. 유년기의 종언을 알리는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진다.

The Last Of Us가 출시되기 약 1년 전, 2012년.

그 해의 GOTY(Game of the Year)를 수상한 ‘더 워킹 데드 시즌 1(The Walking Dead)’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플레이어는 주인공 리(Lee)의 입장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Lee가 보호하던 소녀 클레멘타인의 입장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떄의 클레멘타인이 할 수 있는 선택도 위의 The Last Of Us가 그러했듯이 ‘방아쇠를 당기거나,’ 또는 당기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수 많은 플레이어의 눈물샘을 자극한 ‘가장 인상깊은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되게 된다.

게임의 재미를 단순히 플레이로부터 얻는 어떠한 즐거움이라고만 정의할 수 있을까?

게임의 경험 목표를 결정하는 데에는 플레이어가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은가’를 고려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인간은 감정을 가진 동물이며, 우리는 게임을 플레이할 때에도 끈임없이 어떠한 감정을 느끼며 게임 속 세계에 몰입한다.

비록 부정적인 감정 – 좌절, 실패, 분노, 짜증 – 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감정을 이용해 게임의 재미로 승화한 놀라운 게임도 많다.

소위 말해 ‘항아리 게임’이라고 알려진 ‘Getting Over It’은 온갖 짜증나는 게임 시스템으로 똘똘 뭉쳐진 것으로 유명하다.

게임 개발자는 개발하려는 게임의 경험 목표가 플레이어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할지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게임 개발 과정에서 언제나 이야기되는 것은 게임 ‘시스템’과 그것을 성립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메커닉스이지만, 우리 인간(주로 플레이어)은 게임의 아름다움을 통해 끊임없이 감정의 변화를 느끼는 감정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경험 목표 정하기


그렇다면 이제 경험 목표를 정해보자.

경험 목표는 너무 늘어지거나 디테일해서는 안 된다. 경험 목표라는 말에는 사실 ‘핵심(Core)’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경험 목표는 간결하고, 명확하며,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각 목표는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문장 안에 너무 많은 경험 요소를 담는 것도 좋지 않다. 창발을 위해 다양한 개념의 결합은 좋으나, 난해하면 안 된다.

모호해서도 안 된다. ‘리니지같은 게임’, ‘재밌는 게임’, ‘수집형 캐릭터 게임’이라는 표현은 너무 두루뭉술해서 그 표현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이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자.

우주로 나아가기 직전에도 마시멜로를 구워 먹는 여유는 필요하다. Outer Wilds.
  • 외계인이 되어서 행성을 떠돌아다니며 우주의 미스테리를 알아 가기. (Outer Wilds)
  • 총 한 자루로 좀비떼를 뚫고 엄브렐라 사의 음모를 파헤치며 공주님 구출하기 (Bioharzard 4)
  • 최애캐가 좋아하는 선택을 하며 최애캐에 대해 더 알아가고 그(녀)와 친해져 해피 엔딩 보기 (대다수의 비주얼 노벨)

이러한 경험 목표는 높은 확률로 경험의 ‘장르’를 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물론 개발 도중 장르가 변경될 수 있다.

RPG를 만들려고 했는데 어드벤처가 될 수도 있고, 육성 시뮬레이션을 개발하려고 했으나 경영 시뮬레이션이 될 수 있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고자하는 것이 변하지 않는 한 큰 문제는 없다. 오히려 경험 목표는 게임 개발 과정에서 모든 것이 바뀌어도 여전히 변치않은 채 방향성을 잃지 않게 도와줄 것이다.

경험 목표의 이러한 본질적 특성은 게임 개발의 기나긴 과정에서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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