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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 치명적인 매력의 님펫을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아침에 양말 한 작만 신고 서 있을 때 키가 4피트 10인치인 그녀는 로, 그냥 로였다. 슬랙스 차림일 때는 롤라였다. 학교에서는 돌리. 서류상의 이름은 돌로레스. 그러나 내 품에 안길 때는 언제나 롤리타였다.

『롤리타』 中, 문학동네 판
롤리타 표지

제목: 롤리타(Lolita)

저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출판년도 : 1955년

장르: 범죄, 에로티시즘

“롤리타”란?

“롤리타”는 이름은 이 책에 등장하는 여자아이, ‘돌로레스 헤이즈’의 애칭이자 이 작품의 제목이다.

이 소녀는 한 평범한 편모 가정에서 엄마와 함께 살던 소녀로, 무언가 특별히 눈에 띄는 특징이나 개성을 가진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이 소녀의 집에 ‘험버트 험버트’라는 인물의 남성이 오게 되면서 그녀의 삶은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 책은 1부에서는 롤리타와 험버트가 한 집에서 살게 되기까지의 내용, 2부에서는 롤리타와 험버트의 로드 무비 형식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이야기는 롤리타라는 소녀에게 H.H.(험버트 험버트)라는 이니셜을 가진 한 40대 남성이 찾아오게 되면서 벌어지는 ‘비일상적’ 일상의 이야기이다.

롤리타는 야한 소설인가?

이 질문의 답은 Yes가 될 수도 있고, No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험버트가 롤리타라는 이 소녀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일그러진 성애(性愛)를 주제로 한다. H.H는 롤리타를 강간하고, 협박하면서도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40대 아저씨의 10대 소녀에 대한 변태적인 집착. 이 사실만 두고 본다면 이 소설은 야한 소설이 맞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정사에 대한 묘사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그런 육체적 관계가 있었겠거니 하는 추측 정도만 가능할 뿐이다. 종종 ‘강간’이라든지,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비유하는 어떠한 용어들이 묘사되기는 하나 이 이야기의 흐름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즉, ‘롤리타’는 성적 욕망이 주요 소재이기는 하나, 이 이야기의 주제는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포르노그래피보다는 지저분한 연정 소설에 가깝다.

만약 성욕을 채우기 위해 이 책을 집어든다면? 분명 실망하게 될 것 같다.

롤리타와 로리타 컴플렉스

사실 나는 ‘롤리타’라는 작품명을 접하기 전, ‘로리’와 ‘로리타 컴플렉스’라는 용어를 먼저 알고 있었다.

이 두 용어는 현 시대의 미소녀 서브컬처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키워드다.

로리는 성적 매력을 지닌 어린 여자아이를 또는 그러한 기호를 의미한다.

여기서 핵심은, ‘로리 캐릭터’는 단순히 나이가 어린 여자 어린이가 아니라 성인의 체형을 가진 미성숙한 아이라는 것이다. 어린 여자아이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외모임에도 가슴이 크다거나 색기를 가지는 등 섹스 어필 요소를 내포한 캐릭터를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로리타 컴플렉스란, 이런 로리 캐릭터에 대한 성적 기호를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흔히 ‘로리콘’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인다.

그리고 이 롤리타라는 작품 속의 ‘롤리타’와 ‘험버트’는 바로 이 ‘로리’와 ‘로리콘’에 대응하는 인물이다.

이 책의 주인공, 롤리타는 이제 사춘기에 막 접어든 성적 성숙이 시작되는 소녀(=로리)이며, 험버트는 그러한 롤리타를 병적으로 사랑하는(=로리콘) 사람이다.

이 두 가지 용어가 여전히 서브컬처 계열에서 아주 흔히 쓰이는 용어임을 고려해본다면, 롤리타라는 작품은 비록 읽은 사람은 적더라도 현 시대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랑, 그 매혹적인 이름의 저주

핑크빛 벽지와 회색 천장이 마치 여아의 허벅지와 팬티를 암시하는 듯하다.
@Jamie Keenan
거친 중년의 손바닥 위에 한 장미꽃이 미처 다 피지 못하고 시들어 있다.
@Rachel Berger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롤리타는 이 시대의 가장 논쟁적인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이 표지 디자인들의 메타포를 해석하는 것도 또다른 감상의 즐거움이다.

이 작품, ‘롤리타’의 핵심 소재는 바로 ‘사랑’이다.

험버트가 롤리타라는 소녀를 사랑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사고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금기의 사랑이며, 집착의 사랑이며, 부도덕한 사랑이며, 일방적인 사랑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험버트’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저주에 걸려 버린 나머지, 그의 운명을 천천히 파멸을 향해 운전하게 된다.

결국 그 결말이 파국일지라도, 그러한 미래가 다가올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했기 때문에. 변치 않고 사랑하기 때문에.

애너벨과의 이별과 롤리타와의 만남

그러나 마법 때문이든 운명 때문이든 간에 롤리타는 애너벨에서 비롯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험버트는 40대 초반(소설 초반에는 30대 후반)의 남성이다. 그도 어린 시절을 보낸 나날이 있었고, 그의 첫사랑은 롤리타가 아닌 ‘애너벨’이라는 소녀였다.

험버트가 아직 13살에 불과하던 어느 날 그는 마찬가지로 그의 또래인 애너벨을 알게 된다. 이 소년소녀는 서로에게 운명처럼 이끌렸고, 사랑했고, 빠져들었다. 아직 어린 두 사람이었지만, 미숙하기에 오히려 더 아름다운 사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랑은 오래가지 않는다. 애너벨은 그 타오르듯 열정적인 바닷가에서의 경험 이후 오래지 않아 요절하고야 만다. 험버트의 사랑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게 되고, 그 이후 험버트에게는 오랫동안 사랑이 찾아오지 않는다. 비록 육체적인 관계를 수도 없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게 곧 불혹의 나이가 가까워지던 험버트에게, 운명처럼 ‘로(롤리타)’라는 소녀가 나타난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 하지만 이 우연은 마치 필연처럼, 두 사람의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어떠한 흐름으로 잡아 당긴다.

님펫에의 집착, 그리고 롤리타

정상적인 남성에게 여학생이나 걸스카우트 단원들의 단체사진을 보여주고 제일 예쁜 아이를 찾아보라고 하면 당연히 님펫을 선택할 듯싶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온갖 표징- 이를테면 조금은 고양이를 닮은 광대뼈의 윤곽선, 가냘프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팔다리, 그 밖에도 쓰라린 눈물과 부끄러움과 절망 때문에 차마 일일이 말할 수 없는 여러 지표- 을 바탕으로 건전한 뭇 아이들 속에서 치명적인 작은 악마를 한 눈에 알아보려면 예술가인 동시에 광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애너벨과의 불꽃같은 사랑이 좌절되면서 험버트의 애정관은 뒤틀린다.

험버트는 점차 나이를 먹어가지만, 그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은 전부 에너벨의 또래 ‘소녀’가 되어버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 짧은 시간동안 급속도로 성적 성숙을 이루는 약 10살에서 14살 정도의 소녀만 사랑할 수 있게 되어버린다.

험버트는 이들을 ‘님펫’이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님프’라고 하는 그리스어가 어원인데, 이들은 일종의 요정으로서 젊고 예쁜 여성의 형태를 띠고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롤리타’는 바로 이 험버트가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하던 ‘님펫’이었기 때문에 험버트의 표적이 된다.

험버트는 롤리타의 집에서 살게 되고, 롤리타의 법적 가족이 되며, 롤리타의 ‘새아빠’가 된다.

롤리타, 그리고 그녀의 엄마인 샬럿 헤이즈는 이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이 ‘새아빠’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동물적인 사랑과 고갈되어가는 님펫의 시간

사실 내가 미성년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어리고 순결하고 요정 같은 금단의 소녀가 지닌 투명한 아름다움 때문이라기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초라한 현실과 나에게 약속된 위대한 이상- 즉 위대하지만 영원히 실현할 수 없는 장밋빛과 잿빛의 미래- 사이의 격차를 이렇게 무한한 완벽성으로 메워가는 상황이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리라.

나는 이른바 ‘섹스’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렇게 동물적인 행위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 나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것은 더욱더 원대한 계획이다. 나는 님펫들의 위험천만한 마력을 영원히 붙잡아두고 싶은 것이다.

님펫의 시간은 유한하다.

고작 10살에서 15살 언저리의 소녀만이 험버트가 말하는 ‘님펫’에 해당한다.

님펫이라면 그 누구라도 결국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님펫’으로부터, 험버트가 말하는 징그러운 ‘여대생’이 된다.

결국 롤리타도 점차 나이를 먹으며 님펫으로서 가지고 있는 마력이 고갈될 것이고, 험버트에게서 버려지게 될 것이다.

험버트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그렇기에 그는 님펫의 시간이 고갈되기 전에, 최대한 빨리 그 님펫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그 최대의 장애물은 바로 롤리타의 엄마, ‘샬럿 헤이즈’다. 그녀는 롤리타를 집에서 가능한 한 오랫동안 떼어놓으려고 했으며, 롤리타와 험버트가 같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험버트 입장에서는 님펫의 시간을 고갈시키는 데 누구보다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그녀였다.

이제 2년밖에 남지 않은 롤리타에게 남은 ‘님펫의 시간’을, 샬럿은 그마저도 1년을 집에서 떼어놓으려고 하면서 험버트의 애간장이 타들어가게 한다.

하지만 험버트에게는 기회가 찾아온다. 바로 이 샬럿이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죽게 되면서, 험버트가 롤리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진 것이다.

마침 롤리타가 험버트에게 성적 호기심을 드러내게 되면서, 험버트를 가로막을 건 이제 아무것도 없게 된다.

롤리타와의 기나긴 여정… 그리고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의 양심이란 아름다움을 즐긴 대가로 치르는 세금 같은 것

마침내 님펫의 유한한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붙잡는 데 성공한 험버트.

그는 롤리타와 함께 미국 전역을 떠도는 대장정을 시작한다.

샬럿의 죽음이라든지 그 상속과도 같은 골치아픈 문제는 그 옛날 집과 함께 두고온 채, 롤리타와의 ‘신혼 여행’은 그렇게 막을 올린다.

험버트는 집을 떠나 수십, 수백 일동안 호텔이나 모텔을 전전하며 돈을 펑펑 써대도 남을 만큼의 돈이 있었다.

한편 롤리타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유일한 가족이 험버트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험버트는 롤리타를 먹여주고 재워주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만약 롤리타가 험버트를 강간이라든지 유괴 등의 명목으로 고발한다면 어떻게 될까?

험버트도 자신이 하는 일이 어디에 드러내기에 떳떳한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언젠가 이 관계가 파국을 맞이할 수 있음을 경계했다.

롤리타에게는 이렇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만약 네가 고발한다면 나는 감옥으로 갈 것이나, 너는 공공복지부의 고아 신세가 될 거라고.

그 좋아하는 예쁜 옷들과 립스틱과는 영영 이별한 채 비행청소년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렇게 살게 될 거라고.

그렇다. 롤리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 ‘새아빠’가 가자는 대로 갈 수밖에. 그리고 그가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하지만 롤리타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 사람의 말대로 따르며 아예 여생을 보낼 생각은 없었다. 항상 기회를 엿보며 험버트로부터 빠져나갈 방안을 궁리했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험버트였다. 롤리타가 누구와 대화만 나누어도 그 일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롤리타가 자기 몰래 용돈을 모은 것을 빼앗아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자꾸만 롤리타가 자신을 두고 어디론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험버트가 점차 이 불안감에 사로잡혀 정신적으로 코너에 몰리던 어느 날, 롤리타는 정말로 험버트의 불길한 예감처럼 홀연히 사라져버리고 만다.

재회. 그리고 이별.

우리가 기괴하고. 짐승 같은 동거생활을 하는 동안,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의 롤리타는 날이 갈수록 가정생활이 아무리 불행해도 근친상간의 패러디 같은 관계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이 고아 소녀에게 마련해준 삶은 그렇게 보잘것없었다.

험버트는 님펫을 사랑했다. 롤리타를 사랑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사랑했다.

그런 험버트임에도 롤리타를 다시 찾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것도 롤리타의 편지가 아니었으면 롤리타와의 재회는 영영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롤리타의 편지를 통해 겨우겨우 찾아간 롤리타의 집. 품 안에는 언제든 발사준비가 된 권총 한 자루가 있었다.

롤리타는 더 이상 님펫이 아니다. 그렇다면 롤리타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이제는 다하게 되었을까?

험버트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 저주받은 사랑의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

롤리타를 위해. 자신을 위해.


저자, 나보코프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저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사진

나는 교훈적인 소설은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다. 존 레이가 뭐라고 말하든 간에 『롤리타』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에게 소설이란 심미적 희열을, 다시 말해서 예술(호기심, 감수성, 인정미, 황홀감 등)을 기준으로 삼는 특별한 심리상태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에만 존재 의미가 있다.

『롤리타』에 대하여, ‘작가의 말’ 中

이 책의 저자, 나보코프가 롤리타를 출간하자 그를 보고 성도착증을 가진 사람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러한 성적 욕망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글을 쓴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다.

롤리타가 일그러진 성애를 이야기한 ‘문제적 작품’인 만큼 당시 세간의 ‘롤리타’에 대한 삐딱한 시선, 그리고 독자들로부터 불쾌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롤리타로부터 불쾌감을 느낀만큼 이 책의 저자인 나보코프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된다.

40대 남성의 10대 소녀에 대한 변태적 집착, 포르노그래피, 그리고 교훈도 감동도 없는 이야기, 그리고 자기변명으로 가득찬 변명의 이야기들.

이것을 통해 나보코프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저 험버트라는 인물을 통해 상상 속의 소녀를 겁탈하는 것이 이 책을 쓴 목적이었을까?

소설 『롤리타』를 이루는 험버트의 기나긴 자기변명의 회고가 마침내 끝나면, 나보코프가 롤리타의 가장 마지막에 쓴 ‘작가의 말’이 이어진다.

이 글은 이 작품의 첫 장에서 롤리타에 대해 서술한 ‘존 레이 박사’의 말과 수미상관의 구조를 이룬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나보코프가 소설 내내 숨겨둔 이 책이 진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을 알게 된

다.

이 소설 속에 성도착자의 생리적 충동에 대한 언급이 좀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린애도 아니고, 무식한 비행청소년도 아니고, 동성애를 즐기며 뜨거운 밤을 보내고 나서 불건전한 부분을 모두 삭제한 고전을 읽는 모순된 상황을 감내해야 하는 영국 사립학교 학생들도 아니다.

우리는 성인이며, 교양인이며, 건전한 이성관계와 따뜻한 사랑을 할 수 있는 현대 시민이다.

이 책의 내용이 비록 조금 불편하다고 해서, 이 소설에 검열의 칼질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정말로 교양 있는 성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이 진짜로 꼬집으려고 했던 건 이 책에 대해 불쾌하다는 선입견(프레임)을 가진 독자들과 이 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꽉 막힌 사회가 아닐까.

불비불 돈시돈(佛視佛 豚視豚).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말이다.

이 책이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해서 책을 불태우고 작가를 욕하고 내용을 칼질한다면, 정말로 끔찍한 것은 그 작품이 아니라 그것을 검열하는 사회이다. 이 책은 출판사에서 여럿 거절을 당하고 검열을 당할 뻔했으나 결국에는 저자의 의도대로 출판되었고 이 세계 문학사에 한 획을 긋게 되었다.

이 책은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회 비판 소설이다. 단 한마디도 ‘자유’를 논하지 않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도 검열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발버둥친 역사 그 자체다.

나보코프는 이 책의 텍스트를 통해 이 사회의 불편한 검열주의를 꼬집은 것이다.

롤리타라는 책은 험버트의 자기변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롤리타』가 꼬집은 우리의 이 불쾌한 지점을 어떻게 ‘자기변명’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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