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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대사 쓰기: 설정은 다른데 대사가 비슷한 이유


캐릭터 대사 쓰기: 설정은 다른데 대사가 비슷한 이유

들어가는 글

완벽주의 학생회장, 유행에 민감한 분위기 메이커, 외국에서 와 모든 게 낯선 재벌가 아가씨

캐릭터 기획서를 읽어보면 셋은 분명 다른 캐릭터다.

좋아하는 음식도 다르고, 성장 배경도 다르고, 같은 상황에서의 말투 예시도 저마다 따로 적혀 있다. 그런데 막상 시나리오를 쓰면 셋이 비슷한 질문을 하고,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갈등을 푸는 방식과 성장의 방향까지 비슷해진다. 특정 장면에서는 이름을 가리면 누가 말했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투나 태도도 비슷하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캐릭터 간의 차별점이 설정 기획서에만 남겨져 있을 뿐, 정작 캐릭터성을 볼 수 있는 대사나 장면에서는 그러한 개성이 잘 드러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작가는 캐릭터의 입을 빌려 가능한 한 명료하게 설명하려고 하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캐릭터의 반응도 그때그때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보이곤 한다. 그러다 보면 냉정한 학생회장도, 분위기 메이커도, 재벌가 아가씨도 ‘타이틀’만 그러할 뿐 캐릭터성이 사는 게 아니라 작가가 묻어서 캐릭터성이 감춰져버리고 만다.

캐릭터별로 말투가 비슷하다는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끝마다 특이한 어미를 붙인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캐릭터성을 보여주겠다는 욕심이 그 장면의 자연스러움을 해칠 수 있다.

이전 글에서는 사건이 트리거라면 캐릭터는 엔진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사건을 만나도 각자의 욕망과 결함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해야 캐릭터 중심 이야기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번 글은 그 실전편이다.

같은 떡볶이를 앞에 둔 세 사람의 대사를 바꿔보면서, 설정을 실제 대사로 번역하는 방법을 살펴보려 한다. 핵심은 독특한 말투가 아니라 세 가지 차이다.

  1. 그 캐릭터만이 말할 수 있는 정보
  2. 그 캐릭터만이 보일 수 있는 반응
  3. 그 캐릭터만이 상대에게 품는 의도

캐릭터다운 대사는 정보를 전달하는 문장이 아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며, 상대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행동이다.

말투를 바꾸기 전에 대사의 재료부터 달라야 한다

세 캐릭터가 처음으로 한 분식집에 왔다고 가정해보자.

  • 서윤: 완벽주의자인 학생회장. 초등학생 때 할머니의 분식집 일을 자주 도왔다. 매운 음식을 잘 먹긴 하지만, 남들 앞에서 완벽해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이 먹지 못하는 수준의 매운맛에 도전하게 되는 등 폭주하곤 한다.
  • 미나: 유행에 민감한 분위기 메이커. SNS와 유행을 따라가는 것을 좋아한다. 음식을 맛보다 먼저 눈으로 먹는 타입이다. 매운 음식을 못 먹지만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면 몇 입 정도는 먹어줄 의향이 있다.
  • 로아: 외국에서 자란 재벌가 아가씨. 떡볶이를 먹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저 서윤, 미나와 가까워지고 싶어서 이번 약속에 따라왔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라 떡볶이에 대해 아직 잘 모른다.

캐릭터 설정만 보면 각 캐릭터 간의 차이점은 어느 정도 머리에 그려진다. (물론 캐릭터 기획 단계에서 매운걸 잘 먹는다는 둥의 설정을 할 일은 없겠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위해 임의로 추가해보았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전달하고 싶은 정보를 ‘떡볶이가 맛있다는 사실 전달’로 잡으면 대사는 이런 식으로 쓰이기 마련이다.

서윤: “맛있네.”
미나: “오, 맛있다!”
로아: “정말 맛있어요.”

말끝은 조금씩 다르지만 세 사람은 같은 정보를 반복한다. 캐릭터 설정은 대사 바깥에 있고, 작가가 전달하려는 감상 ‘맛있다’만 대사 안에 남았다.

대사를 차별화하려면 억양이나 어미를 먼저 만질 게 아니라, 각 인물이 장면에서 꺼내는 재료를 바꿔야 한다.

그 캐릭터만이 말할 수 있는 정보

캐릭터마다 알고 있는 것이 달라야 한다.

여기서 정보란 세계관의 비밀이나 중요한 복선만을 뜻하지 않는다. 직접 해본 일, 실패한 기억, 가족에게 배운 기준, 직업 때문에 눈에 들어오는 디테일도 모두 정보다.

우리는 위에서 서윤이 분식집 일을 도운 경험이 있다는 설정을 알고 있다. 그러니 서윤은 단순히 맛있다고 말하기보다 조리 과정의 차이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서윤: “쌀떡인데도 양념이 안 겉도네. 한 번 식혔다가 다시 끓였나 봐.”

미나는 유행에 민감한 친구다. 인스타나 SNS에서 떡볶이와 관련한 신메뉴와 유행을 자주 접했거나 찾아봤을 확률이 다른 캐릭터보다 높다. 그렇다면 같은 떡볶이를 먹어도 맛보다 사진을 찍어야 한다거나 떡볶이의 인기나 화제성을 먼저 떠올릴 수 있다.

미나: “잠깐, 먹지 마. 인스타 올릴 사진부터 찍어야 해.”

로아에게 떡볶이는 처음 보는 음식이다. 다른 두 사람에게 당연한 것을 질문할 수 있다.

로아: “그런데 이건 식사인가요, 간식인가요? 어묵과 달걀까지 있는데 디저트라고 하기에는 제법 본격적이네요.”

세 사람은 떡볶이를 보고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이는 만약 캐릭터의 설정을 알려주고 난 뒤, 캐릭터의 이름을 가리더라도 누가 이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차이점을 만들어낸다. 가령 미나는 유행에 민감한 친구인데 조리법 얘기를 하는 건 어색하고, 서윤이 떡볶이를 어떻게 먹는거냐고 하면 독자 입장에서는 코미디가 된다.

이게 캐릭터의 대사를 다르게 만드는 첫 번째 기준이다.

대사를 쓴 뒤 이름표를 바꿔도 자연스럽다면, 그 문장에는 아직 그 사람만의 정보나 관찰이 부족할 가능성이 높다.

단, 과거사를 보여주겠다고 매번 회상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어릴 적 할머니와 살았는데 그때 우리 집 형편은……”처럼 설정을 한꺼번에 설명하면 대화가 멈춘다. 먼저 “한 번 식혔다가 다시 끓였나 봐”처럼 현재의 관찰을 보여주고, 상대가 궁금해할 때 과거를 짧게 꺼내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 캐릭터만이 할 수 있는 반응

같은 정보를 받아도 무엇을 크게 느끼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떡볶이가 맵다는 사실은 셋에게 같다. 하지만 성격, 욕망, 결함처럼 각 인물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같은 상황에 대한 반응을 다르게 만든다.

학생회장 서윤은 떡볶이를 잘 먹긴 하지만 자신은 완벽해야 한다는 착각 탓에 폭주하게 된다. 가령 그 가게에서 가장 매운 맛조차도 자신은 잘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미나는 매운 것을 못 먹지만 사진을 찍으려면 음식을 주문해야 한다. 그래서 사진을 찍고 한두 입 정도 먹은 다음에는 너무 매워서 못 먹겠다며 그냥 음식을 남겨버린다.

로아는 매운맛이라는 자극 자체를 처음 접한다. 그런데 이 자극이 싫지만은 않고 오히려 재밌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고향에서는 못 먹어본 맛이라면서.

이러한 캐릭터의 설정을 반영한다면 대사는 이런 식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서윤: “이 맛이 이 가게에서 제일 매운 맛이라고요? 아, 아닌 거 같은데요. 쿨럭, 쿨럭!”
미나: “아 잠만. 사진 좀 찍고! 미안한데, 포크로 치즈 좀 이렇~게 늘려줄래? 그래, 그렇게!”
로아: “우으으… 혀가 너무 아파요… 하지만… 맛있어요. 매운 맛이란 이런 거군요. 스트레스풀려요!”

캐릭터의 반응은 성격을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대사를 통해 성격을 알 수 있게 만들 뿐이다.

유의할 점은 모든 반응을 극단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다. 캐릭터가 등장할 때마다 가장 매운맛부터 주문하고, 사진을 찍기 위해 대포 카메라를 들고 오고, ‘매운맛 대단해!’라며 머리를 탁 붙잡는 건 코미디 장르 문법에 가깝다.

코미디물을 만드는 거라면 이런 식으로 반응을 극대화해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캐릭터성을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지 그 선을 잘 정해주는 것은 결국 작가의 몫이다.

이러한 대사가 여러 장면에서 일관되게 반복될 때, 독자는 기획서를 몰라도 캐릭터성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 캐릭터만이 품을 수 있는 의도

세 번째는 상대를 향한 말의 목적이다.

기본적으로 발화(대사)는 혼잣말이 아닌 이상 상대에게 어떤 반응을 끌어내려는 행동이다. 정보를 얻고 싶어서 묻기도 하고, 인정받고 싶어서 자랑하기도 한다. 사과를 받고 싶지만 자존심 때문에 핀잔을 줄 수도 있고, 가까워지고 싶어서 별것도 아닌 추억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다.

로아가 “원래 이런 음식인가요?”라고 묻는 이유도 물론 처음 떡볶이를 먹었기 때문에 하는 반응일 수도 있지만, 이어지는 대사를 통해 대화에서 캐릭터 간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게 설계할 수 있게 만들 수도 있다.

로아: “서윤 씨는 어릴 때부터 이런 걸 자주 먹었나요?”

굳이 서윤을 콕 집어 이런 질문을 함으로써, 로아가 떡볶이 자체보다 서윤의 과거와 경험에 관심이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

서윤은 어릴 적부터 분식집 일을 자주 도왔기 때문에, 떡볶이 조리법을 설명할 수도 있지만, 어릴 적 할머니와의 추억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다.

떡볶이 조리법 얘기를 하면 서윤의 ‘떡볶이 전문가’ 같은 면모가 보이겠지만, 할머니 얘기를 꺼내면 서윤이 할머니라든지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히 한다는 인상을 준다. 어떤 면모를 부각하고 싶은가에 따라 작가는 대사를 통해 서로 다른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서윤: “자주는 아니고. 할머니 가게가 바쁠 때 조금 도왔어.”
로아: “저, 서윤 씨가 만든 것도 언젠가 먹어보고 싶어요!”
서윤: “그, 그렇게 능숙하진 않아. 손님한테 팔던 건 내가 만든 게 아니니까.”
미나: “오, 나도 먹고 싶어. 내일 오면 돼?”
서윤: “너는 사진이나 그만 찍고 좀 먹어라.”

여기서 서윤의 마지막 대사는 서윤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대화의 화제를 넘기면서도, 미나의 ‘SNS 매니아’라는 면모를 부각하는 대사다.

캐릭터의 의도가 들어간 대사는 겉의도와 속뜻을 함께 갖게 된다. “능숙하진 않아”가 정말로 능숙하지 않다는 뜻인지, 아니면 서윤이 완벽주의자인 탓에 만들 줄은 알지만 남들 앞에 내놓고 맛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뜻인지는 독자가 더 읽으면서 점점 알게 된다.

특히 캐릭터 스토리나 연애 장면처럼 잔잔한 1:1 대화에서는 이 차이가 중요하다. 그런 이야기에서는 보통 사건이나 갈등이 크지 않기에 독자가 볼 것은 두 사람이 ‘사소한 상황’에서 서로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어디까지 허락하며, 어떤 마음을 감추는지이기 때문이다.

장면에 따라 캐릭터성을 조절하는 방법

위급한 순간에는 캐릭터보다 상황이 먼저다

그렇다면 모든 대사에 정보, 반응, 의도를 빽빽하게 담아야 할까?

그렇지 않다. 상황이 급할수록, 대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보량도 줄어든다.

전투 중에 동료의 머리 위로 구조물이 떨어진다고 해보자. 평소 정중한 캐릭터라는 이유로 이렇게 말하면 어색하다.

“그 자리에서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위급 상황에서의 제1목표는 캐릭터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즉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이 순간에는 “피해!”, “피하세요!”, “엎드려!” 정도면 충분하다. 만약 군인 캐릭터라면 “좌측으로 엄폐해!”처럼 군인스러운 정보를 한 단어 더 붙일 수 있겠지만, 매 순간 과거사와 배경 맥락까지 무리해서 끌어올 필요는 없다.

급할수록 말은 짧아진다. 이때 세 사람의 대사가 비슷해지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 모두가 위험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

그 와중에도 독특한 어미와 긴 비유를 고집하면, 캐릭터가 위험보다 자기 말투 컨셉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경고 멘트는 짧고 비슷하게 가져가더라도, 사후 반응을 다르게 해서 캐릭터성을 챙길 수 있다.

서윤: “움직이지 마. 다친 데부터 확인할게. 미나, 직원 불러.”
미나: “야, 나 봐. 괜찮지? 대답해봐. 진짜 놀랐잖아.”
로아: “저, 이런 때는 구급차부터 부르면 되나요? 바로 부를게요.”

이처럼 상황을 통제하고 역할을 나누는 사람, 상대의 반응을 직접 확인하려는 사람, 대처는 잘 몰라도 일단 뭐라도 하려는 사람으로 반응이 나뉜다.

캐릭터성을 살리려고 문장을 억지로 만들 필요는 없다. 어디서 확실하게 보여줄 것인지 고민하는 게 더 낫다.

잔잔한 1:1 대화에서 뻔한 말을 피하는 법

위급한 장면과 반대로, 잔잔한 장면에서는 캐릭터성에 더 신경 써야 한다.

캐릭터 스토리에서 플레이어와 단둘이 야경을 본다고 상상해보자. 직전에는 처음으로 손을 잡았고, 고민을 들은 뒤 함께 식사를 했다.

이런 장면에는 폭발도 추격도 없다. 억지로 넣어서도 안 된다. 독자가 기대하는 것은 사건의 스펙터클보다, 이 캐릭터가 플레이어에게만 보여주는 얼굴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 “오늘 즐거웠어”, “너와 함께라서 다행이야”, “앞으로도 잘 부탁해”만 반복하면 관계는 진전됐지만 캐릭터는 남지 않는다. 그런 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캐릭터나 할 법한 대사로 잔잔한 장면을 끝내면 그동안 앞에서 쌓은 설정이 작동하지 않는다.

이럴 때는 감정을 더 화려하게 표현하기보다,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기억이나 경험 하나를 끌어오면 된다.

서윤이 주인공과 둘이서 초매운 떡볶이를 먹고 난 뒤, 두 사람 다 고생을 하는 장면에서 서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미안해요. 괜히 제일 매운 걸 시키자고 했네요. 다음에는… 덜 매운 걸로 해요.”

이 대사에는 서윤이 무리한 선택을 했다는 사실, 그 결과 플레이어를 곤란하게 했다는 인식, 그리고 다음 만남을 완전히 끊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함께 비친다.

플레이어의 답도 너무 튈 필요는 없다. 그저 무난하게 넘어가도 괜찮다.

“아니야. 매웠지만 재밌었어. 다음에도 같이 먹자.”

플레이어의 대답을 더 코믹하거나 또는 정색하는 식으로 플레이어의 캐릭터성을 챙길 수도 있겠지만, 히로인의 호감과 매력을 느낄 장면에서 플레이어를 내세우는 건 역효과가 나기 십상이다.

매번 자극적인 반응을 끌어내는 대사와 상황만 반복하면, 결국 캐릭터가 아니라 자극과 기호만 남는다. 나중에는 인물 자체보다 ‘매운맛에 약한 모습’, ‘당황해서 더듬는 말투’, ‘의외의 갭’ 같은 모에 요소만 기억되기 쉽다.

여러 명이 모이면 대사는 관계를 움직여야 한다

1:1 장면에서는 두 사람이 하나의 상황과 배경을 두고 서로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그 의도가 중요하다.

여러 명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각 캐릭터의 생각과 개성이 부딪히는 티키타카를 설계해야 한다.

모두에게 기계적으로 한 번씩 말할 차례를 주는 일이 아니다. 서로 자기 할 말만 하는 것도 아니다.

앞사람의 말이 자연스럽게 다음 사람의 입을 열게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세 사람이 떡볶이의 맛을 차례로 평가한다고 해보자.

서윤: “맛있네.”
미나: “조금 맵지만 맛있어.”
로아: “저는 달아서 좋아요.”

취향은 다르지만, 앞사람의 말이 다음 사람의 반응을 만들지는 않는다. 세 사람이 각자 짧은 감상만을 남기고 대화가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여럿이 있는 장면에서는 “무슨 맛인가?”보다 “그 말이 누구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누구를 편들게 하며, 다음 대사를 어떻게 바꾸는가?”를 보는 편이 좋다.

서윤: “양념은 괜찮은데 떡을 너무 오래 끓였어.”
미나: “또 시작이네. 맛있으면 그냥 맛있다고 하면 안 돼?”
로아: “저는 서윤 씨 말이 궁금한데요. 오래 끓이면 무엇이 달라지나요?”
미나: “잠깐, 로아. 지금 누구 편이야?”
서윤: “편을 가를 문제가 아니잖아.”
미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입꼬리는 왜 올라가 있는데?”

서윤의 평가는 미나에게 잘난 척처럼 들린다. 미나는 그 태도를 견제하고, 로아는 서윤을 더 알고 싶어서 질문한다.

하지만 로아의 질문은 결과적으로 서윤의 편을 드는 말이 된다. 미나의 견제는 다시 서윤이 로아의 관심을 반기고 있다는 사실을 들춰낸다. 서윤은 말로는 부정하면서도, 그 인정을 완전히 밀어내지는 못한다.

떡볶이의 객관적인 맛은 중요하지 않다. 이 장면이 독자에게 알려주는 것은 로아가 누구에게 관심이 있는지, 미나가 두 사람 사이에서 무엇을 경계하는지, 서윤이 누구의 인정을 반기는지다.

코미디를 극대화하고 싶다면 서로 극과 극인 입맛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장면을 위해 갑자기 취향을 만들면 다음 이야기에서 설정이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된다. 관계를 먼저 정하고 취향은 그 관계를 드러내는 도구로 두는 편이 안전하다.

둘이 오랫동안 끈끈한 관계라면 좋아하는 메뉴가 같아서 말없이 마지막 튀김을 양보할 수 있다. 늘 경쟁하는 관계라면 맵기 4단계를 놓고도 승부를 벌일 수 있다. 상극처럼 보이지만 은근히 닮은 관계라면, 다른 사람들은 질색하는 단맛을 둘만 좋아해 잠시 입맛 동맹이 될 수도 있다.

이 장면에서 취향이 관계를 대신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이미 설계한 관계가 취향을 통해 보이게 할 뿐이다.

코노스바식 글쓰기에서 욕망과 결함이 사건을 굴렸다고 설명했다면, 대사 장면에서는 각자의 정보와 반응, 의도가 다음 대사를 굴린다. 한 사람의 말이 다음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그 반박이 세 번째 사람의 편들기를 부르며, 그 편들기가 처음 두 사람의 관계까지 바꿔야 한다.

캐릭터가 많을수록 모든 사람에게 한 번씩 말할 차례를 배분하기보다, 앞사람의 말이 다음 사람의 자존심과 관심, 경계를 건드리게 만드는 편이 중요하다.

설정표를 대사로 바꾸는 세 번의 질문

실제로 대사를 쓰기 전에는 캐릭터마다, 정확히는 이번 장면에서의 상태를 아래 세 줄만 메모해도 좋다.

  1. 정보: 이 상황에서 이 사람만 알고 있거나 먼저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2. 반응: 무엇을 크게 느끼고, 무엇을 숨기거나 과장하려 하는가?
  3. 의도: 이 말을 들은 상대가 무엇을 말하거나 행동하기를 바라는가?

떡볶이 장면의 로아라면 다음처럼 정리할 수 있다.

  • 정보: 떡볶이를 먹어본 적이 없다.
  • 반응: 매운 고통도 새로운 경험이라 흥미롭게 받아들인다.
  • 의도: 서윤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이 세 줄이 있으면 “맛있어요” 대신 질문하고, 낯선 감각을 붙잡고, 다음을 약속하는 대사가 나온다.

초고를 쓴 뒤에는 이름을 가리고 읽어보자. 구분되지 않는 문장을 발견했다면 말투부터 비틀지 말고, 장면 전체에서 세 가지가 제대로 갈라지고 있는지 다시 확인하면 된다.

  • 다른 인물에게는 없는 정보가 들어 있는가?
  • 감정의 크기가 아니라 반응의 방향이 다른가?
  • 상대에게 기대하는 결과가 있는가?
  • 앞사람의 말을 받지 않고 각자 감상만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 위급한 장면인데 캐릭터성을 챙기느라 문장이 길어지지는 않았는가?

이 질문은 완성된 대사를 채점하는 만능 공식은 아니다. 모든 문장이 세 요소를 전부 품을 필요도 없다.

장면 전체를 보았을 때 세 사람의 정보와 반응과 의도가 구분되고, 그 차이가 다음 대사를 움직인다면 충분하다.

정리하는 글

캐릭터 설정이 많다고 캐릭터다운 대사가 저절로 나오지는 않는다.

생일, 혈액형, 좋아하는 음식, 대표 말투를 20개 적어도 그 설정이 현재 장면에서 무엇을 보게 하고 어떤 선택을 시키는지 정하지 않으면 모두가 같은 말을 한다. 반대로 설정표가 짧아도 각 인물이 아는 것, 반응하는 방식, 상대에게 원하는 것이 다르면 대사는 자연스럽게 갈라진다.

그렇다면 설정 기획을 할 때 기획자나 작가는 대체 어느 정도의 설정과 맥락을 준비해야 하는 걸까?

설정이 100페이지라고 해서 10페이지짜리 설정보다 항상 나은 것은 아니다. 10페이지 안에 어떤 장면에 넣어도 그 캐릭터다운 선택을 만들어내는 ‘반복 가능한 코어 컨셉’이 있다면, 오히려 그 편이 더 강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설정의 분량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장면에서도 반복해서 작동하는 캐릭터의 코어가 있는가다.

다음 글에서는 적은 설정으로도 수많은 장면을 만들어내는 ‘캐릭터 코어’를 어떻게 설계할지 다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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