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글
스토리를 구성하는 요소를 크게 나누면 사건, 캐릭터, 배경이라는 세 가지가 있다. 그중 무엇부터 시작할지는 작가마다 다르다. 먼저 거대한 사건을 정한 뒤 그 사건을 해결할 인물을 배치할 수도 있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든 뒤 그 인물에게 어울리는 사건을 붙일 수도 있다.
어느 한쪽의 방식이 무조건 옳은 건 아니다. 미스터리나 재난물처럼 사건의 구조가 핵심인 장르에서는 플롯을 먼저 짜는 편이 대체로 유리하고, 라이트 노벨, 일상물, 러브코미디처럼 캐릭터의 매력을 오래 소비하는 작품에서는 사건보다 캐릭터를 먼저 세우는 방식이 특히 잘 먹힌다. 소재 자체는 흔하고 익숙하더라도 캐릭터의 개성이 곧 같은 사건을 색다르게 변주시킨다.
최근 필자는 여러 서브컬처 게임의 스토리가 지향하는 방식이, 한 마디로 ‘우당탕탕’이라는 키워드로 수렴된다고 생각한다. 세계관과 분위기는 서로 달라도, 캐릭터들이 사소한 목표를 두고 일을 키우고 싸우고 수습하는 가벼운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블루 아카이브》에서 시로코가 ‘은행을 털자’는 대사를 하는 장면은, 은행을 습격하는 메인 스토리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시로코라는 캐릭터의 ‘급발진’이 낳은 해프닝이기 때문에 재미있다.
물론 모든 서브컬처 게임이 같은 문법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원신》처럼 세계의 역사와 지역 서사를 긴 호흡으로 쌓는 작품도 있다.
국내 서브컬처 게임의 스토리를 쓰거나 포트폴리오를 준비한다면, 긴 호흡의 세계 서사뿐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캐릭터의 개성과 관계를 보여 주는 역량을 기르는 게 더 유리할 수 있다.
필자는 최근 업계가 추구하는 ‘우당탕탕’이라는 키워드에 가장 근접한 작품이 무엇일지 고민한 적이 있었는데, 그러한 작풍에 가장 가까운 작품은 바로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 이른바 《코노스바》라는 결론을 내렸다. 코노스바는 단순히 가볍고 코미디한 이세계물 라이트노벨이 아니다. 캐릭터의 욕망과 결함이 서로 맞물리면서 작가가 거대한 사건을 밀어 넣지 않아도 이야기가 굴러가는 작품이다.
이번 글에서는 이 방식을 코노스바식 글쓰기라고 부르고, 캐릭터가 사건을 직접 굴리는 서브컬처 게임 스토리 설계법을 살펴보겠다.
핵심부터 말하면, 사건은 이야기의 시작점을 제공할 뿐이며 이후의 소동과 해결은 캐릭터가 결정해야 한다.
능력과 욕망, 결함을 함께 설계하면 사소한 사건 하나만으로도 캐릭터다운 충돌과 해결을 만들 수 있다.
사건이 트리거라면, 캐릭터는 엔진이다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면 보통 이런 질문부터 시작한다.
이번 스토리에서는 어떤 일(사건)이 벌어지는가?
여름 축제가 열린다. 중요한 물건이 사라진다. 정체불명의 괴물이 등장한다. 도시 전체가 정전된다. 이런 사건을 먼저 정한 뒤, 사건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캐릭터를 한 명씩 배치한다.
안정적인 방식이다. 발단과 결말이 선명하고, 독자가 무엇을 따라가야 하는지도 쉽게 정리된다. 특히 범인을 찾아야 하는 미스터리,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가 커지는 재난물, 승패가 분명한 스포츠물에서는 사건을 중심으로 플롯을 짜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런데 사건 중심 설계는 캐릭터에게 ‘사건에 맞는 행위’를 요구할 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사건을 해결하려면 누군가는 단서를 발견해야 한다. 어쩌다 보니, 평소에는 관찰력이 뛰어나지 않던 캐릭터가 갑자기 결정적인 흔적을 찾아낸다.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하니 말수가 적던 캐릭터가 갑자기 침묵을 깨고 그 자리를 떠야 하는 이유를 읊기 시작한다. 마지막 전투가 필요하니 누군가는 별다른 이유 없이 무모한 도발과 전투를 벌인다. 작가가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위해 캐릭터에게 사건을 밀어붙이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캐릭터는 이야기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플롯에 끌려가는 장기말이 된다.
반면, 캐릭터 중심 이야기에서는 질문부터 달라진다.
이 캐릭터들은 같은 사건을 만나면 어떻게 다르게 반응하는가?
여기서 핵심은 ‘같은 사건’인데, 사건을 고정해두고 캐릭터만 다르게 배치하면 캐릭터의 개성이 곧 온전히 그 사건에 녹아들어 그 캐릭터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 명의 캐릭터가 축제용 케이크를 준비해야 한다고 해보자. 요리 천재는 혼자 완벽한 케이크를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무엇보다 규칙을 중시하는 학생회 임원은 까다로운 규칙을 준수하기 전까지는 요리가 불가능하다며 조리실을 봉쇄한다. 경쟁심이 강한 아이돌은 옆 반이 더 화려한 케이크를 만든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3단 케이크를 7단으로 바꾼다.
‘케이크를 준비한다’는 사건 자체는 평범하다. 그러나 캐릭터 중심 이야기에서는 세 사람이 그 일을 대하는 방식은 평범하지 않게 작동한다. 한 사람의 에고가 다른 사람의 에고를 자극하고, 그 갈등이 세 번째 사람의 에고에 연쇄적으로 싸움을 붙인다. 사건은 계기를 제공했을 뿐이다. 하지만 케이크가 무너진 이유는 그 자리에 있던 캐릭터 때문이다.
코노스바식 캐릭터는 유별난 강점과 결점이 공존한다
코노스바식 글쓰기의 핵심은, ‘결점이 있는 캐릭터들이 각자의 캐릭터성(결함) 때문에 캐릭터 간 충돌을 빚어내고 자동으로 사건을 만들어내는 구조’에 있다.
코노스바의 주요 인물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분명한 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능력은 마찬가지로 각자가 가진 치명적인 ‘하자(단점)’ 때문에 급격히 약화된다. 아쿠아는 여신다운 강력한 능력을 갖췄지만 허영심과 충동 때문에 일을 키운다. 메구밍의 폭렬 마법은 압도적이지만 하루에 한 번밖에 쓸 수 없고, 그럼에도 폭렬 마법만을 고집한다. 다크니스는 뛰어난 방어력을 갖췄지만 공격을 제대로 맞히지 못한다. 카즈마는 현실적인 판단과 임기응변에 능하지만 돈과 안전이 걸리면 자신의 원칙을 빠르게 바꾼다.
이 조합은 일반적인 판타지 장르 파티로 보면 크게 부족한 것 같지는 않다. 회복을 맡은 힐러, 압도적인 화력의 마법사, 공격을 받아내는 탱커, 상황을 판단하는 리더가 모두 갖춰져 있다. 하지만 그러한 ‘스펙’보다 골치 아픈 것은 그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각자가 자신의 욕망과 집착을 앞세우기 때문에,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파티가 끊임없이 ‘바보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그럼에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각자의 능력이 필요하다. 평소의 결함만 남고 강점이 드러나지 않으면 이들의 존재는 그저 민폐가 된다. 반면 능력만 남고 결함이 사라지면 그냥 하나의 평범하고 유능한 모험가 파티가 될 뿐이다. 코노스바 캐릭터는 문제를 만드는 성향과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하나의 캐릭터 안에 동시에 담겨 있다.
이들은 능력이 부족해서 실패하는 게 아니다. 능력은 충분한데 그들이 가진 욕망과 결점이 기묘한 방향으로 엉켜버리기 때문에 매 순간 쉽게쉽게 풀리는 법이 없다.
서브컬처 작품에서 캐릭터를 만들 때도 네 가지를 먼저 생각해볼 수 있다.
- 이 캐릭터의 ‘다른 캐릭터에는 없을’ 강점은 무엇인가?
- 이 캐릭터가 ‘다른 캐릭터에는 없을’ 욕망은 무엇인가?
- 이 캐릭터의 강점과 충돌하거나 욕망을 좌절시킬 약점(단점)은 무엇인가?
- 이 캐릭터의 욕망은 어떠한 행동으로 나타나는가?
가령 “유능한 경호원”이라는 설정만으로는 재밌는 에피소드가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과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무능해 보인다”는 잘못된 믿음을 붙여보자. 그러면 이 경호원은 매일 야근을 자처하고, 수상한 징조를 포착해도 지원을 부르기보다는 혼자 그것을 조사하러 가는 등의 그림이 쉽게 상상이 된다.
욕망과 결점 때문에 좌절되는 모습만 보이면 그건 ‘무능/민폐’형 캐릭터다. 이 캐릭터는 애초에 ‘유능한 경호원’이라는 설정이 있기에, 어떠한 역경에 부딪힌다 해도 마지막에는 ‘유능한’ 경호원으로서의 관찰력과 전투 능력으로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모습이 보여야 한다. 사건을 일으킨 결함과 사건을 해결하는 장점이 같은 캐릭터에 심겨 있다. 독자는 그 캐릭터를 무능하다고 느끼기보다 “유능한데 참 서툴다”고 느끼게 된다.
웃음은 서투르지만 진심일 때 나온다
코미디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을 웃음거리로 삼느냐는 문제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동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과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다. 이런 욕망은 그 자체로 우스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독자가 캐릭터를 이해하고 응원하게 만드는 핵심이다.
웃음은 그 욕망을 표현하는 캐릭터의 방식이 서투르기 때문에 나와야 한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사람과 축제에 가고 싶으면서 “딱히 같이 가고 싶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츤데레 캐릭터가 있다고 해보자. 상대방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혼자 가겠다고 하면, 다급하게 새로운 이유를 붙일 수도 있다. “경호가 필요하다”, “동선 점검을 해야 한다”, “혼자 가면 효율이 떨어진다” 같은 궁색한 변명이 이어질수록 감춰 둔 욕망은 오히려 선명해지고 독자의 입에는 미소가 번진다.
이렇게 코미디가 캐릭터의 진심을 드러내면 웃음과 호감이 동시에 쌓인다.
그렇다고 모든 캐릭터를 진심과 반대로 말하는 츤데레로 만들면 안 된다. 같은 인정 욕구를 갖더라도 표현 방식은 달라야 한다. 한 사람은 능력을 과장하고, 한 사람은 모든 일을 혼자 떠맡고, 한 사람은 경쟁 상대를 깎아내리며, 또 다른 사람은 무관심한 척 자리를 피할 수 있다.
결국 같은 인정 욕구라도 각 캐릭터마다 다른 ‘개성’이 의외성을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은 동일하더라도 캐릭터가 달라지면 이야기도 달라지는 것이다.
작은 사건 하나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캐릭터 중심 스토리텔링이라고 해서 사건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캐릭터가 움직이려면 욕망을 자극할 기회가 필요하다. 다만 처음부터 세계 멸망에 준하는 대규모 사건을 준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시작 이야기의 사건과 소재는 소박할수록 좋다.
- 축제의 홍보 영상을 촬영한다.
- 하루 동안 임시 카페를 운영한다.
- 동아리방 청소 당번을 정한다.
- 한정 상품을 사러 간다.
- 휴일 일정을 조정한다.
- 길을 잃은 동물을 주인에게 돌려준다.
필자는 이 중 ‘임시 카페 운영하기’를 예로 들어보겠다. 세 명에게는 다음과 같은 역할과 욕망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 요리사: 손님이 얼마나 올지 예측하지 않고 재료를 산처럼 준비한다.
- 서빙 담당: 손님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 위해 모든 경우의 수를 담은 주문지 하나를 백과사전만큼 두껍게 만든다.
- 영업 담당: 요리사와 협의되지 않은 ‘스페셜 메뉴’를 광고해서 손님을 모객한다.
요리사의 무심한 재료 준비는 이후 산더미 같은 재고 처리로 이어진다. 서빙 담당의 ‘두꺼운 주문지’는 손님의 기가 질리게 만들어 주문을 꺼리게 만든다. 영업 담당이 광고한 메뉴가 실제로는 ‘주문이 불가’하자, 손님은 사기 당했다고 생각하고 발걸음을 돌린다. 누구 하나만 바보라서 실패한 것이 아니다. 각자 나름대로 팀에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서로 다른 욕망과 선택이 겹치면서 일이 커졌다.
이 구조에는 두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사건의 책임이 한 사람에게만 쏠리지 않는다. 특정 캐릭터가 매번 사고를 치고 나머지가 뒤처리하면 그 인물은 곧 ‘민폐 캐릭터’가 된다. 반면 여러 인물의 선택이 연쇄적으로 문제를 키우면 소동은 팀 전체의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이 된다.
둘째, 캐릭터를 바꾸면 같은 소재로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카페라는 배경과 매출 목표는 그대로 두더라도, 참여하는 캐릭터의 욕망과 관계가 달라지면 사건의 확대 과정과 결말이 바뀐다. 이것은 라이브 서비스 게임에서 특히 유용하다. 제한된 배경과 리소스를 재사용하면서도 새로운 캐릭터 조합만으로 다른 맛의 이벤트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과거에 공유한 서브컬처 게임 캐릭터 에피소드 기획서가 시놉시스와 3막 구조, 에피소드 플로우를 문서로 정리하는 방법이었다면, 이번 방식은 그 표를 채우기 전 단계에 해당한다.
먼저 캐릭터마다 무엇을 원하고 어떤 실수(오해)를 할지 정하면, 발단 이후의 플롯을 훨씬 쉽게 채울 수 있다.
각자가 가진 ‘엉뚱한 믿음’이 평범한 사건을 코미디로 변주한다
코미디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어떤 농담을 던질지부터 고민하기 마련이다. 매 대사마다 웃긴 비유를 넣고, 인터넷 밈을 붙이고, 유행에 맞춰 누구나 빵 터지는 유행어를 섞어놓는다.
하지만 이렇게 만든 대사는 캐릭터가 바뀌어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누가 말해도 똑같이 웃긴 대사는 캐릭터의 대사가 아니다. 거기에서 독자는 ‘작가의 존재’를 느끼게 되고 작품의 몰입감이 깨진다.
캐릭터 중심 코미디에서는 각 인물이 자신의 에고를 고집하기 때문에 자기만의 논리를 고집해야 한다. 기본 흐름은 간단하다.
주장 → 반박 → 억지로 합리화 → 우당탕탕와장창
앞서 예를 들기 위해 가정했던 임시 카페 얘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1,000인분 정도는 거뜬하게 재료를 준비했어.”
“오늘 행사에 오는 사람이 100명밖에 안 되는데?”
“한 명당 10인분씩 먹게 하면 돼.”
“주문서 작성에만 30분이 걸리잖아.”
“그 어떤 이상한 주문이 와도 주문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한 필수 조치예요.”
“그런데 왜 주문서를 더 뽑고 있어?”
“이번 가오픈 때 생각지도 못한 요청사항을 받아서 주문서를 새로 뽑으려고요.”
“그 스페셜 메뉴는 대체 어쩌다가 홍보지에 들어간 거야?”
“아니 난 재료를 그만큼 준비했길래 그거를 주로 팔려는 줄 알았지.”
어떤 문장이 특별히 기발해서 웃긴 것은 아니다.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 자신의 결함을 끝까지 합리화하기 때문에 웃기다. 더구나 이 대화는 각 캐릭터의 결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특정 1명이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엉망진창이기에 누구 하나를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가 성립한다.
대화는 짧을수록 좋다. 한 인물이 10줄 동안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기보다, 2~3번의 티키타카 속에서 욕망과 약점이 드러나야 한다. 설명이 필요하다면 먼저 반응을 보여준 뒤 이유를 붙이는 편이 자연스럽다.
또한 한 사람만 계속 지적을 받아서는 안 된다. 과거의 실수나 약점을 계속 꺼내면 친한 사이의 농담이 아니라 집단 괴롭힘처럼 보일 수 있다. 누군가의 허세가 무너졌다면, 다음 순간에는 그 허세를 지적한 인물의 집착이나 위선도 드러나야 한다. 캐릭터들이 번갈아가며 엉망이 되어야, 캐릭터의 매력이 훼손되지 않고 코믹한 집단으로 기억된다.
누군가 문제를 일으켰다면 문제 해결에도 기여해야 한다
캐릭터의 결함으로 사건을 만들면 필연적으로 호감도 문제가 생긴다. 일정이 지연되고, 동료가 추가 업무를 하고, 비용이 늘어나는데도 캐릭터가 책임지지 않는다면 독자는 웃기보다 짜증을 느낀다.
그래도 캐릭터가 일으킬 수 있는 문제의 스케일은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일상 이벤트라면 가벼운 오해, 적은 비용, 몇 시간의 일정 지연 정도는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 반면 다른 인물의 꿈을 망가뜨리거나, 심각한 상처를 의도적으로 이용하거나, 생명과 안전을 무책임하게 다루는 행동은 가벼운 코미디로 수습하기 어렵다.
소동을 일으킨 캐릭터는 해결에도 기여해야 한다.
카페가 마비된 상황에서 주인공이 갑자기 완벽한 운영안을 내고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보자. 요리사, 서빙 담당, 홍보 담당은 사고만 친 뒤 옆에서 주인공을 구경하게 된다. 이야기는 해결되겠지만 캐릭터의 매력과 가치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세 사람이 자기 능력을 수습에 사용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요리사는 뛰어난 요리 실력으로 순식간에 산더미같은 코스 요리를 준비한다. 서빙 담당은 완벽한 기억력으로 모든 손님의 주문을 외우고 순식간에 요리를 전달한다. 홍보 담당은 인플루언서를 비롯해, 다른 가게에서는 쉽게 모객하기 힘든 손님을 끌어와 가게가 문전성시를 이루게 한다. 문제를 만들었던 당사자들이 해결 과정에서도 고스란히 개성을 뽐낸다.
주인공이나 플레이어 캐릭터가 그들의 과제를 대신 치워줘서는 안 된다. 서로 책임을 떠넘기던 인물들이 다시 움직일 명분을 만들어 주고, 지금 누구의 능력이 필요한지 짚어주는 정도가 알맞다.
이때 캐릭터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필요도 없다. 허세가 강한 캐릭터가 한 편의 이벤트를 겪었다고 갑자기 겸손해지면, 다음 이야기에서는 기존의 매력이 사라진다. 대신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하던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딱 한 번 도움을 요청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다시 허세를 부리더라도, 독자는 그 인물이 정말 필요할 때는 동료를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스토리 한 편이 끝났다고 캐릭터의 결함까지 사라질 필요는 없다. 예전과 같은 성향을 유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그 성향을 다루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성장한 것처럼 보인다.
감동 뒤에 웃겨도 되지만, 감동을 없애서는 안 된다
우당탕탕 코미디를 추구한다고 해서 모든 장면을 웃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캐릭터가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거나, 중요한 관계를 선택하거나, 동료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장면에는 진지한 감정을 드러내고 충분히 그 여운에 잠기게 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감정적인 장면 뒤에는 절대 농담을 넣으면 안 된다는 뜻도 아니다. 긴장 해소를 위한 짧은 개그는 오히려 감정의 쓰나미에 숨이 막히지 않게 숨을 틔어주는 기능을 한다.
판단하는 기준은 농담을 넣는 시점보다 무엇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가에 있다.
캐릭터의 상처와 진심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캐릭터의 감정이나 고민을 사실 별것 아니었다는 식으로 치부하면, 이야기의 맥이 빠지고 캐릭터에 대한 몰입도 깨진다.
대신 감정적인 장면이 거의 마무리된 뒤, 고민이나 갈등과 전혀 무관한 사소한 포인트를 언급함으로써 이야기를 환기할 수 있다. 오해가 풀리고 서로를 믿기로 한 두 사람이 서로를 뜨겁게 바라보는 순간, 그들이 박살 낸 가게 주인이 조용히 와서 수리비 청구서를 내미는 식이다.
“더치페이 할거지?”라는 농담을 던진 캐릭터 앞에서 상대 캐릭터도 가게 주인에게 “카드 되나요?”라고 농담조로 돌려준다.
여기서 웃음은 관계의 변화를 흐리지 않는다. 오히려 두 사람이 이제 같은 문제를 함께 감당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단, 죽음과 상실, 심각한 차별, 핵심적인 구원처럼 작품 전체의 의미를 결정하는 장면에서는 훨씬 신중해야 한다. 가령 이벤트 스토리에서 잘 작동한 가벼운 유머를 메인 스토리의 클라이맥스에 고스란히 가져가면 곤란하다.
글을 마치며
캐릭터 중심 스토리텔링은 사건을 가볍게 다루자는 말이 아니다. 사건이 아무리 거대하고 정교해도 그 안에서 캐릭터가 작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면, 독자가 기억하는 것은 사건의 개요뿐이다. 평범한 심부름 하나라도 캐릭터가 자기다운 욕망과 행동으로 반응하면 그 과정은 하나의 에피소드가 된다.
필자는 과거 블루 아카이브 시나리오 포스트모템 리뷰에서 넥슨게임즈 양주영 디렉터의 NDC 2022 강연을 정리한 적이 있다. 당시 강연에서 소개된 블루 아카이브의 중요한 대전제는, 이 이야기가 학원물이며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학생이라는 것이었다.
블루 아카이브에서는 학생들이 총기를 들고 싸우고, 전차를 타고 여름 바캉스를 떠나며, 심지어 은행을 털 계획까지 세운다. 사건만 떼어놓고 보면 황당하다. 그러나 그 행동은 작품이 정한 ‘학생들의 이야기’라는 대전제와 각 캐릭터의 욕망, 관계, 동아리 활동 안에서 발생한다.
과감한 사건이 제시되더라도 캐릭터는 작가가 부여한 기능을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객체가 아니다. 사건을 자기 방식대로 잘못 이해하고 실행하면서 우당탕탕한 결과를 만드는 적극적인 주체다.
코노스바식 글쓰기도 결국 같은 질문으로 돌아온다. 얼마나 거대한 사건을 준비했는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욕망과 결함을 가진 캐릭터들에게 작은 사건 하나를 던졌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행사 준비, 아르바이트, 방 청소, 한정 메뉴 주문처럼 별것 아닌 일이어도 좋다. 좋은 캐릭터 조합은 그런 일 하나만으로 싸우고, 공범이 되고, 실패하고, 결국 서로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
사건이 트리거라면, 캐릭터는 엔진이다.
다음에 스토리를 쓰거나 캐릭터 설정을 설계할 때는 “이번에는 무슨 사건을 다룰까?”라는 질문을 잠시 미뤄보자. 대신 캐릭터 두세 명을 먼저 한자리에 놓고 이렇게 질문해보는 것이다.
이 아이들은 왜 서로 일을 키울 수밖에 없는가?
그 답이 정리되면 사건을 억지로 키우지 않아도 된다. 누가 먼저 선을 넘고, 누가 말리다가 더 큰 문제를 만들지 자연스럽게 보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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