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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라이터는 글만 잘 쓰면 된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 스토리가 좋아서 특히 여운이 오래 남는 게임들이 있다.
이런 게임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나도 게임 시나리오를 써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봤을 거다.
시스템 기획이나 밸런스 기획 영역은 게임에 대한 이해가 풍부하고 엑셀도 잘 해야할 것 같다.
이에 비해, 시나리오 기획 영역은 왠지 글만 잘 쓰면 될 것 같아서 조금 만만해 보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회사가 시나리오 기획자에게 요구하는 역량은 ‘글만 잘 쓰면 된다’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
시나리오 지원자라면 눈여겨봐야 할 영역, ‘연출’

위 이미지는 26년 6월 기준 게임잡에서 볼 수 있는 ‘시나리오 라이터(기획자)’에게 요구되는 업무를 발췌한 것이다.
보다시피, ‘연출’이라는 영역도 함께 담당해야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연출’이 무엇일까?
왜 회사에서는 글만 잘 쓰면 될 것 같은 시나리오 라이터에게 ‘연출’이라는 영역도 함께 맡기고 싶어하는 걸까?
오늘은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 지원자가 알아두면 좋을 ‘스토리 연출’에 관해서 간단하게 소개해보고자 한다.
연출 없는 스토리는 없다
시나리오 집필 vs 시나리오 연출 제작
- 집필: 인물, 대사, 지문을 글로 표현하는 것
- 연출: 그것을 통합해서 시나리오의 목적을 달성시키는 것
연출이란, 집필한 스토리를 게임화한 것을 말한다.
집필한 스토리를 플레이어가 볼 수 있는 시청각적 요소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이다.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가 영화나 드라마의 시나리오 라이터와 다른 점은 바로 자신이 만드는 스토리를 ‘게임화’해야한다는 점이다.


보통 글쟁이라고 하면 워드나 엑셀, 스크리브너, 노벨라 등과 같은 집필 전문 프로그램을 들어보거나 사용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 또한 이러한 도구를 써서 스토리를 쓴다. 여기까지는 다른 시나리오 라이터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시나리오 라이터가 쓴 ‘대본’을 읽는 게 아니라, PC나 스마트폰에서 어떠한 캐릭터나 배경 위에 말풍선이나 대사창과 같은 영역 위에 뿌려지는 텍스트를 통해 스토리를 감상한다.
즉, 시나리오 라이터가 맡은 영역은 자신이 쓴 대본이 플레이어가 감상할 수 있도록 어떠한 데이터 작업을 마치는 것까지인 것이다.
보통 구글 스프레드시트나 엑셀, 또는 각 회사마다 개발자가 구현한 ‘연출툴’을 이용해서 라이터의 대본을 ‘데이터화’하게 되는데, 이를 스크립트 작업이라고 한다.
글만 잘 쓰는 작가가 게임 시나리오도 잘 쓸까?

(위 게임은 필자의 설명과 무관합니다.)
어떤 게임회사는 판타지 소설이나 웹소설에서 이름을 날린 전문 작가를 데려와 시나리오를 맡기기도 한다.
그런데 이때 주의해야 하는 건 작가가 게임, 그리고 게임 시나리오에 대해서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예전에 필자가 재직했던 회사에서는 판타지 소설 매니아라면 누구나 알 만한 작가를 영입해 세계관/설정/시나리오를 맡긴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게임 내에서 시나리오가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를 잘 몰랐던 것 같다.
그 작가의 설정을 보고 ‘게임화’를 해야 했던 사람들은 큰 곤욕을 치렀다.
그가 쓴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설정 문서 가운데, 실제 게임에서 쓸 수 있는 요소는 1/10에 불과했다고 한다.
작가가 게임 시나리오는 어떤 식으로 데이터화가 되는지 모르다보니 게임에서 살릴 수 없는 요소가 지나치게 많았던 것이다.
이는 내부 개발자뿐만 아니라 그 게임의 설정을 기획한 작가도 서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회사에서 시나리오 라이터에게 요구하는 역량
영화나 드라마, 연극 등에서는 ‘연출가’가 따로 존재하는 경우가 보통이지만 게임 업계에서는 연출가라는 사람을 별도로 두는 경우가 드물다.
만약 연출가가 따로 존재하더라도, 스토리 대본을 게임화하는 연출가가 아니라, 시네마틱 영상이나 기타 애니메이션/VFX를 다루는 ‘영상 전문가’일 확률이 높다.
시나리오 라이터라는 역할에 요구되는 역할은 바로 플레이어의 감성적인 경험 전반을 설계하는 전문가라는 속뜻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라이터를 채용한 회사는 그에게 시나리오만 맡기지 않는다. 보통 캐릭터나 배경, 애니메이션, SFX나 VFX 리소스 등의 컨셉 기획을 요구하며, 그것을 통해 플레이어에게 어떤 경험을 전달하고 싶은지 듣고 싶어한다.
웹소설 작가처럼 혼자 글만 잘 쓰면 되는 게 아니다. 자신이 쓴 글을 ‘게임에서 보는 사람’이 얼마나 재밌게 느낄 수 있게 하는가가 중요하다. 이게 바로 다른 업계와 게임 업계의 시나리오 라이터 간의 결정적인 차이다.
‘스토리’와 ‘연출’의 조화가 뛰어나야 좋은 시나리오다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는 스토리와 연출 두 가지 방면에서 모두 전문적인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제 아무리 기승전결이 짜임새 있게 구성된 대본이라고 해도, 게임 내에서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지루하고 잠이 오는 스토리로 표현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스토리의 퀄리티를 내팽개친 채 화려한 리소스를 무한정 투입한다고 해서 좋은 시나리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똑똑한 시나리오 라이터는 자신이 쓰는 글이 얼마나 리소스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지 생각하면서 글을 쓴다.
이게 바로 게임 업계에서 연출가가 아니라 시나리오 라이터가 연출까지 함께 맡는 이유가 아닐까.
게임 스토리 연출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게임 스토리는 플레이어가 게임 내에서 확인할(플레이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게임 스토리 연출 제작은 아직 대본에 불과한 게임 시나리오를, 캐릭터와 배경, BGM, 기타 연출적 요소를 가미해서 ‘플레이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작업이다.
대본을 게임에서 보여주기 위한 재료는 아래와 같다.
- 캐릭터
- 대사(및 지문)
- 배경화면
- BGM
- SE(SFX)
- UI 컴포넌트(편의성 버튼)
- 그 외 우리 게임 시스템에 호환되는 기타 리소스(팝업, 이모티콘 등)
UI적 요소라든지 각 게임에 따라서 필요한 리소스는 게임마다 다를 수 있다.
아래의 다섯 가지 요소는 어떤 게임이라도 반드시 가지고 있는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캐릭터
캐릭터가 없는 시나리오가 존재할 수 있을까?
하다 못해, 동물의 왕국에서도 서로 먹이를 갖고 으르렁대거나 짝짓기를 하기 위해 모여드는 동물이 있다.
캐릭터의 대사는 그 캐릭터의 개성을 드러내고, 캐릭터의 행동은 그 캐릭터의 의지를 드러낸다.
캐릭터의 행동과 대사는 연출의 모든 요소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절대 빼놓을 수 없다.
대사
캐릭터가 등장했다면 발화(대사)를 해야 한다.
물론 캐릭터가 대사 하나 없이 어떠한 움직임을 하거나 이모티콘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기법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일반적인 스토리라면, 당연히 그 스토리에 등장하는 주인공 캐릭터는 말을 할 것이기에 대사는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배경화면
배경은 그 캐릭터가 서 있는 ‘토대’다.
캐릭터가 서 있을 배경이 세팅되지 않는다면 캐릭터는 그저 검거나 흰 어떤 빈 공간에 둥둥 떠있게 될 거다.
만약 하얀 방에 갇힌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흰 단색 배경이 아니라 가령 화이트 룸이라는 이름의 다른 배경을 준비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플레이어들은 성의가 없다고 느낄 것이다.
캐릭터가 마음 속 대사(독백)을 할 때 검은 배경에서 혼자 서 있는 장면을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연출 기법 중 하나일 뿐이지, 배경화면이 없어도 되는 이유를 만들어주는 건 아니다.
BGM
BGM 선정은 연출에서 가장 어려운 요소로 손꼽힌다. BGM을 트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어떤 장면에서 어떤 BGM을 켜고 끌 것인지 정하는 게 어렵다.
BGM은 그 이야기의 무드를 담당한다. 적과의 일생일대의 싸움을 앞두고 있다면 비장한 BGM을, 달콤한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라면 톡톡 튀는 BGM을 쓰게 된다.
잘 나오던 BGM이 갑자기 꺼진다면 플레이어는 긴장감을 느낀다. BGM은 그저 비어있는 사운드를 채우는 게 아니다. 이렇게 플레이어의 감각을 조종할 때 쓸 수 있기에 중요한 것이다.
SE/SFX
SE(Sound Effect)라고도 하고, SFX라고도 하는데, 한마디로 ‘효과음’이다.
아래의 대본을 보자.
나는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 살아 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녀석을 단죄할 시간. 비장한 걸음으로 처형장에 나선다. 철천지 원수를 앞두고… 이제 나는 긴 칼을 들었다. 앞에는 눈에 안대를 쓰고 있고, 손 발은 단단히 결박되어 꼼짝달싹할 수 없는 원수의 모습. 나는 긴 칼을 들고…
힘껏 내려쳤다.
그리고 화면은 순식간에 블랙아웃.
그런데 여기서 ‘슥!’ 소리나, ‘처억!’ 소리 등이 들리지 않았다면? ‘베었나?’, ‘피했나?’. 정확히 그 결말이 어떻게 났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필자는 좋은 연출은 독자, 시청자, 그리고 플레이어가 기대하는 게 있다면 그 기대를 잔꾀를 부리며 숨기려고 들거나 배신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베었다면 ‘벤 소리’가 나야 한다. 때렸다면 ‘때린 소리’가 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플레이어에게 연출 의도를 고스란히 전달할 수 없다.
게임 스토리 연출 능력, 어떻게 길러야 할까?
영상학과 시나리오에 대해 공부하자
미장센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주로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인데, 감독이 어떠한 사물의 배치나 카메라의 움직임 등을 활용해 어떠한 시각적 암시를 줄 때 ‘미장센이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연출 제작 작업은 단순히 캐릭터와 배경, BGM 리소스를 잘 배치하기만 해도 끝나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출 제작을 잘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리소스 사용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 나름의 기법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상학과 시나리오를 공부하는 게 도움이 된다. 특히 카메라 기법과 관련된 용어를 잘 알아두면, 추후 애니메이터나 연출가와 함께 일할 때 소통하기 좋다.
관련해서 필자가 과거 쓴 다른 글이 있으니 확인해보는 것도 좋다.
게임화할 수 있는 ‘지식과 안목’을 기르자
스토리 연출에서 연출가가 할 수 있는 연출의 폭은 아티스트가 준비한 리소스, 그리고 개발자가 구현한 기능만큼만 가능하다.
제 아무리 화려한 영상 기법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표현할 리소스나 기술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진행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연출에 욕심이 있다면 아티스트만큼이나 개발자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어떤 연출이 하고 싶은지 잘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유니티 엔진이나 언리얼 엔진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것을 관리하기 위한 테이블이나 데이터 관리 체계에 관한 지식이 있으면 유리하다.
실제로 필자도 연출에 욕심이 있어서 기능구현서를 쓴 적이 많았다. 당장은 글을 쓰거나 데이터를 채우는 작업이 아니지만, 이런 밑작업을 꾸준히 해두면 나중에 게임 스토리 퀄리티를 눈부시게 발전시킬 수 있으니 틈틈히 해두면 좋다.
서브컬처 게임은 훌륭한 교보재다

Type-Moon의 월희,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마법사의 밤과 같은 비주얼 노벨은 2D 포트레이트 연출의 진수를 보여준다. 수십 장의 컷신 리소스도 물론 함께하긴 했지만, 포트레이트 연출만 봐도 굉장히 다양한 연출을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
3D 연출의 경우 ‘원신’, ‘명조’, ‘명일방주:엔드필드’ 등에서 다양한 연출을 시도한 바 있다. 특히 ‘원신’의 경우, 수메르 지역부터는 카메라 워크를 훨씬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보니 3D 연출을 참고할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글을 마치며
장인의 노하우는 배신하지 않는다
필자는 게임 시나리오도 써 보았고 마찬가지로 게임 시나리오 연출도 해 보았다. 연출이 단조로우면 아무리 대본이 재밌어도 시나리오를 즐기기 어렵다. 하지만 연출의 완성도가 뛰어나다면, 글로 사로잡기 어려운 시선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게임 화면에 붙잡아둘 수 있었다.
필자가 연출의 힘과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은 필자에게 찾아온 어떠한 거대한 행운 덕분이었다.
필자가 다니던 모 회사에서는 연출에 굉장히 일가견이 있는 기획자 분이 계셨다.
사진을 정말 잘 찍는 분이셨는데, 알고보니 과거 스튜디오에서 일한 적도 있다고 하셨다.
필자는 그 분께 직접 연출을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돈 주고도 못 배울 많은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다.
그 분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필자가 만든 연출 결과물은 하나같이 지루하고 보잘것 없었을 것이다.
이후, 필자는 틈틈이 그분의 연출 노하우를 사내 위키에 등록해서 팀원들과 공유했고, 이후 이직한 환경에서도 그러한 노하우를 공유한 적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뿌듯한 것은, 필자가 이직한 뒤에 그분의 노하우를 기반으로 ‘다이얼로그 시스템’을 그분의 연출 스타일에 맞춰서 구현한 것이, 게이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이었다.
비록 필자는 지금 그 회사를 떠나긴 했지만, 그때 팀원들과 함께 좋은 연출을 만들기 위해 함께 고민했었기에 더더욱 기분 좋은 피드백으로 느껴졌다.
앞으로도 필자는 스토리 연출뿐만 아니라 내러티브 전반에 관해 누군가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노하우를 많이 공유하고 싶다. 그 분들과 함께 더 좋은 게임, 더 재밌는 게임을 만드는 순간이 조금이라도 더 앞당겨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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