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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서 통과시키는 방법: 기획이 좋지만 발표에서 엎어질 때


기획서 통과시키는 방법: 기획이 좋지만 발표에서 엎어질 때

들어가는 글

기획자는 결국 남들 앞에서 발표하는 사람

필자가 일하고 있는 조직은 기획서를 다 쓰면 다른 사람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한다.

기존에 다른 회사에서는 기획서 컨펌을 파트장님이나 팀장님에게만 받으면 OK였다. 그래서 기획서를 발표하는 일은 보통 팀 내부에서는 없었고 유관부서(아트팀, 개발팀 등) 앞에서 진행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다 보니 필자가 중요시하는 건 뭐니뭐니해도 ‘논리적 정합성’이 되었다.

빈틈을 가차없이 찌르고 들어오는 타 팀의 질문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발표 내용은 허점이 없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 필자의 발표 스타일이 여기에서는 단단히 역효과가 나고야 만다.

이번엔 무난히 통과되리라 생각한 내 기획이 엎어진 이유

며칠 전, 오후에 모두가 나른할 법한 4시 즈음. 필자의 기획안을 발표하고 있었다.

총 30슬라이드 정도 되는 분량에서 약 12슬라이드 즈음을 얘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급자가 ‘여기까지만 듣겠다’고 하고 발표를 중단시켰다.

그러더니 내게, ‘그래서 이 기획은 한마디로 ~라는 거죠?’라고 질문했다.

필자가 그렇다고 하니 그 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의 내용은 더 볼 것 없이 여기서 끝내고 디벨롭을 더 해 오세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때까지만 해도 청산유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산유수 정도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내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발표장의 그 고요하다 못해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의 적막감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대로 발표를 끝내기엔 미처 발표하지 못한 뒷페이지들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했다.

그래서 필자는 그분이 나가기 전에, ‘발표에서 기대하던 내용이 없었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분의 답은 이랬다. “기획이 나쁜 게 아니다. 하지만 더 좋은 발표가 있을 거다.”

이번 글은 ‘더 좋은 발표’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고찰글이다.


이전 글에서는 기획의 다음 장면을 상상하게 만드는 방법을 다뤘다.

이번 글에서는 같은 기획이라도, 발표를 듣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어떤 페이지부터 보여줘야 하는지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발표 전략: 기획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물밑 작업

발표를 잘한다는 말은 조금 오해의 여지가 있겠다.

목소리가 크고, 말을 유창하게 하고, 슬라이드를 화려하게 만드는 것이 발표의 본질은 아니다.

기획 발표에서 중요한 건 상대가 이 기획을 판단하는 데 필요한 내용을, 상대가 듣고 싶은 순서로 꺼내는 일이다.

기획서의 목차를 바꾸라는 말이 아니다. 기획서는 기획서대로 빈틈없이 써야 한다.

다만 발표의 순서는 리스너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발표 전략 1: 리스너 분석

1. 듣는 사람이 우리 팀일 때

가장 먼저 봐야 할 것은 이 기획이 기존에 팀이 쌓아 온 기획과 어떻게 어우러지는가다.

같은 팀의 사람들은 발표자보다 기획을 덜 이해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기존 컨셉, 이미 결정된 방향, 이전에 실패했던 시도까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이 기획이 재밌습니다”보다 “기존 기획과 겹치지 않으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이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전략적으로 유리하다.

예를 들어 캐릭터 4인조를 제안한다면, 첫 마디를 이렇게 꺼내보자.

이번 기획은 한 마디로, 메카닉을 두고 저마다 극단적인 취향과 고집을 가진, 미식연구회 같은 4인조입니다.

블루 아카이브의 미식연구회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한 줄만으로도 머릿속에 이미 4인조의 그림이 그려진다.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기체를 보면 폭파부터 할 것 같은 공대생 버전의 군상극이겠구나, 하고 말이다.

그다음에 각 캐릭터의 취향과 갈등, 왜 이들이 한 팀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면 된다.

이 발표에서 먼저 꺼내야하는 건 캐릭터의 이름의 어원이나, 무기의 제원, 구현 여부가 아니다.

이 컨셉이 기존 컨셉과 얼마나 조화롭게 어우러지면서도 참신해 보이는지가 먼저다.

2. 듣는 사람이 아트팀, 개발팀 등 유관부서일 때

유관부서 앞에서는 기획서를 앞에서부터 읽는 습관이 훨씬 치명적이다.

가령 아트팀에게 시스템 규칙을 10분 동안 설명하고, 개발팀에게 캐릭터의 과거사를 길게 설명한다면 그들은 자기 차례가 오기 전까지 그저 지루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 기다리는 기간은 ‘기획이 지루하다’고 기억된다.

아트팀은 “그래서 무엇을 그리면 이 기획의 매력이 살아나는가?”를 먼저 알고 싶어 한다. 기획 의도를 한두 문장으로 짚은 뒤, 핵심 실루엣이나 톤앤매너(분위기), 반드시 지켜야 하는 요소나 감정표현 등을 먼저 보여주는 편이 좋다.

예를 들어 “메카를 좋아하는 4인조”라는 설명보다, “같은 로봇 동아리인데 한 명은 군용기를 사랑하고, 한 명은 합체 로봇만 인정하며, 한 명은 기체에 들어가는 기름 냄새를 좋아한다”라고 말하면 아트팀은 무엇을 잡아야 하는지 조금 더 빨리 상상할 수 있다.

개발팀이 가장 먼저 확인할 것은 “무엇을 만들면 되는가”와 “그 기능이 왜 필요한가”다. 핵심 경험을 성립시키는 기능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가령 신규 기능 구현을 하는 이유가 ‘연출력 향상’이라고 가정해 보자. 예를 들어, ‘2D 다이얼로그 스타일 연출 개선 기획안 10개를 준비했습니다’ 보다는, ‘블루 아카이브에서 할 수 있는 연출 8개를 만들어 최소한 그 정도 수준을 갖추면서, 우리만의 연출 요소 2개를 더해 연출에서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가 낫다. 그러면서 연출 예시 영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도 주의할 점이 있다. 개발팀에게 기능만 나열하면 기획 의도가 사라진다. 무엇을 만들지 설명하기 전에, 그 기능으로 유저가 어떤 재미를 느껴야 하는지도 전달해야 한다. (남들이 하니까 우리도 해야한다 라는 기획의도는 개발팀이 싫어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3. 듣는 사람이 높으신 분(PD 등)일 때

디렉터가 발표를 듣는 동안 가장 자주 떠올릴 질문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그래서 이 기획을 내가 지금 들어야 하는 이유가 뭔데?”
PD는 아트 디테일이나 구현 방식보다 먼저, 이 기획이 프로젝트에 어떤 플러스를 만드는지 알고 싶어 한다. 기존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지, 유저가 무엇을 새롭게 느끼는지, 그리고 지금 자신이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신규 콘텐츠를 설명할 때는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

이 콘텐츠는 미연시 감성을 느끼고 싶은 유저를 위한 콘텐츠입니다. 매일 약 1~2분만 투자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의 스토리를 보며 돌파 재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DAU와 MAU 개선 가능성을 검증하고, 최애 캐릭터 육성 이후에도 접속할 이유를 만들고자 합니다.

이 말을 먼저 들으면 PD는 적어도 발표의 목적을 알고 듣게 된다. 이후에 아트 일정, 개발 리소스, 세부 규칙이 나오더라도 “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를 놓치지 않는다.

발표 전략 2: 발표 순서 변경

리스너를 분석했다면 이제 기획서의 페이지를 다시 봐야 한다.

바꿔야 하는 것은 문서의 목차가 아니라 발표할 때 넘기는 순서다.

1. 코어 컨셉 제시

첫 페이지는 기획의 코어를 보여주는 페이지여야 한다. 여기서 코어란 멋있어 보이는 설정 하나가 아니라, 이 기획이 근본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이다. 만약 캐릭터 기획이라면,

이 기획은 [어떤 욕망]을 가진 누구가 [어떤 결점]을 갖고 있지만 [어떤 목표] 때문에 분투하다가 플레이어에게 구원받는 이야기이다.

위의 문장 구조로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이 캐릭터는 메카좋아소녀입니다.’가 아니라, ‘이 캐릭터는 언젠가 합체로봇에 타고 싶은 목표를 가진 소녀인데, 비록 본인이 고소공포증이 있지만, 조종속에 앉고 싶은 로망 때문에 노력합니다’ 같은 게 더 좋다.

2. 리스너가 궁금해 하는 페이지로 점프

코어를 보여준 다음에는 목차 순서대로 가지 않아도 된다. 아트팀이라면 아트 컨셉으로, 개발팀이라면 구현 요소로, PD라면 기대 효과와 결정 사항으로 바로 넘어간다.

발표자는 모든 페이지를 차례로 소개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기 쉽다. 하지만 발표는 기획서를 낭독하는 시간이 아니다. 상대가 판단할 수 있도록 기획서를 안내하는 시간이다.

3. 세부 규칙 및 제반사항

건너뛴 내용은 버리는 내용이 아니다. 질문이 나오면 그때 돌아가서 보여주기 위한 페이지이다.

단, 여기에는 분명한 선이 있다. 이 기획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비용, 리스크, 핵심 가정처럼 상대의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일부러 숨겨서는 안 된다. 발표에서 굳이 다루지 않아도 되는 것은 세부 설정, 예외 규칙, 지금 이 리스너가 당장 결정할 필요가 없는 디테일 등이다.

정보를 덜 주는 것이 아니라, 판단에 필요한 정보부터 주는 것이 핵심이다.

발표 전략 3: 관심의 순서를 설계한다

관심의 순서를 설계한다는 것은, 슬라이드에 적힌 문장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읽는다는 뜻이 아니다.

기획을 텔링하지 말고 스토리를 텔링해야 한다.

필자는 예전에는 “이 기능은 이런 목적입니다”, “이 설정은 저 설정과 연결됩니다”처럼 기획서를 설명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획자가 머릿속에서 어떤 문제를 발견했고, 왜 여러 선택지 중 이 기획에 도달했는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

발표에서는 내가 어떤 사고의 흐름을 거쳐서 여기에 도달했는지 들려줄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반복 육성 콘텐츠를 제안합니다”라고 시작하는 대신, 이렇게 말해 보는 것이다.

유저가 3개월 동안 같은 루틴을 반복하면, 성장의 성취감보다 다음에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피로가 먼저 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캐릭터를 더 오래 키우게 하는 대신, 15분 안에 다른 선택의 결과를 바로 확인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개발 필요 기능 리스트보다 먼저 문제와 목표를 이해한다. 그러면, 문제와 목표에 맞춰서 자신들이 어떻게 더 잘 할 수 있는지 먼저 아이디어를 낼 수도 있고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안을 알아서 수행해줄 수도 있다.

친구에게 “필자가 이런 기획을 만들었다”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자. 슬라이드의 글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이 문제였고, 왜 이 방법을 골랐으며, 그래서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먼저 말할 것이다.

자세한 건 이어지는 ‘스토리텔링 전략’에서 더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스토리텔링 전략 feat. 기획의 정석

박신영의 『기획의 정석』은 필자가 참 좋아하는 책 중 하나다. 여기에서는 기획을 상대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이야기로 전달하는 일을 중요하게 다룬다.

게임 기획 발표에 적용하면, 스토리텔링은 기획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일이 아니다. 상대가 “그래서 왜?”라고 묻기 전에 필요한 답을 먼저 꺼내는 일에 가깝다.

왜(Why)와 무엇(What)의 연결

상대방이 “이걸 왜 해야 하지?”라는 의문을 품는 순간, 발표자는 이미 뒤늦게 필요성을 설명하게 된다. 그래서 기능이나 설정을 말하기 전에, 이 기획이 해결하려는 문제와 목표부터 공감시켜야 한다.

“신규 레이드 콘텐츠를 만들겠습니다”는 무엇만 있는 문장이다.

반면 “상위 유저가 성장한 캐릭터를 시험할 장소가 부족하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8인 협동 레이드를 제안합니다”는 왜와 무엇이 연결된 문장이다.

무엇을 만들지보다 먼저, 왜 지금 이것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현상과 문제점(Problem)

기획 발표에서 흔히 하는 실수는 만들고 싶은 것을 먼저 자랑하는 일이다. 멋진 캐릭터, 재미있는 시스템, 화려한 연출을 앞세운다. 물론 그것들이 나쁜 게 아니다.

하지만 상대가 겪고 있는 불편함과 프로젝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먼저 짚지 못하면, 기획은 “언젠가 하면 좋긴 하겠네”에서 멈춘다.

예를 들어 “교환소 UI를 전면 개편하겠습니다”보다 “유저가 재화를 한 화면에서 다 볼 수가 없어서, 메뉴 화면을 불필요하게 여러 번 들락날락하는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가 더 설득력이 있다.

문제를 정확히 짚으면 기획은 취향이 아니라 필요가 된다.

해결책과 콘셉트(Solution & Concept)

문제를 말한 뒤에는 해결책이 머릿속에 그림으로 남아야 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장황한 기능 설명이 아니라, 상대가 한 번에 붙잡을 수 있는 매력적인 한 문장이다.

전투에서 단순 전투력 경쟁만 반복됨으로써 오는 지루함과 피로를 줄이기 위해, 이번 콘텐츠는 매 라운드 바뀌는 규칙을 읽고 조합을 갈아 끼우는 퍼즐형 전투다.

이 한 문장에는 무엇을 해결하는지와 어떤 재미를 주는지가 함께 들어 있다. 이후의 세부 규칙은 이 한 문장을 증명하는 역할을 하면 된다.

단, 한 문장 컨셉이 멋있다고 해서 실제 기획까지 단순해지는 것은 아니다. 컨셉은 입구에 불과하고, 구체적인 기능 구현서는 그 입구 뒤에 있는 구조까지 책임져야 한다.

실행 방안(Action Plan)

좋은 기획이라도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가 없다면 듣는 사람은 불안해진다. 특히 PD나 유관부서 앞에서는 기획의 매력만큼 실행 가능성이 중요하다.

실행 방안은 모든 일정과 리소스를 나열하는 페이지가 아니다. 무엇을 먼저 검증하고,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페이지다.

예를 들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차 목표는 코어의 검증입니다. 1달 내로 프로토타입을 구현해 재미를 검증하고, 목표를 달성하면 넘어갑니다. 2차 목표는 지속가능성의 검증입니다. 신규 콘텐츠 개발 시 매번 기능을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모듈화할 수 있는 구조인지 검토하고, 1~2개의 데이터를 올려서 라이브 구조에 대응 가능한지 검증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상대는 “이 기획이 크다”는 사실만 듣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가 지금 결정할 범위인가”를 알게 된다. 확신은 화려한 말보다 다음 행동이 보일 때 생긴다.

글을 마치며

발표 전략의 핵심은 결국 지피지기 백전불태다.

내 기획이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기획을 듣는 사람이 무엇을 가장 먼저 알고 싶어 하는지까지 알아야 한다.

다음 발표에서는 기획서의 첫 페이지를 열기 전에 한 줄만 적어 보자.

이 사람은 이 기획에서 무엇을 가장 먼저 알고 싶어 할까?

그 답이 발표의 첫 페이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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