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글
The most powerful man in the world embarks on a frantic mission to prove he is humanity’s savior before the disaster he’s unleashed destroys everything.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남자가 자신이 초래한 재앙이 모든 것을 파괴하기 전에 인류의 구원자임을 증명하기 위한 필사적인 임무에 나선다.
– IMDb Digger (2026)
흥행에 실패한 영화를 보러 가는 건 그만한 궁금증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Digger(이하 디거)」의 이야기다.
「미션 임파서블」시리즈를 비롯해, 할리우드에서 액션 영화의 흥행 보증 수표로 등장하는 ‘톰 크루즈’가, 그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뚱뚱한 노인 분장을 하고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픽션같은 이야기였다.
국내에서는 이미 ‘오디세이’나 ‘암살자(들)’, 그리고 ‘치이카와 극장판’ 등의 영화가 서로 엎치락뒤치락 극장가에서 대결하고 있었고, ‘디거’의 존재감은 그 경쟁구도 사이에서 독립영화만큼 작고 초라했다.
이미 ‘흥행에 실패한 영화’라는 딱지가 붙어버렸으니, 이후에 반등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을 터였다.
그런데 그런 영화의 평가를 보며, 오히려 나는 ‘흥행실패’라는 결과가 믿기지가 않았다.

「디거」를 다보고 영화관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 여자친구와 돌아오는 길에 약 30분 동안 디거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
무언가 논쟁의 여지가 있었던 건 아니다. 디거라는 인물을 어떻게 봐야 할지, 영화가 보여준 장면들은 무슨 의미였을지 각자의 생각을 나눴을 뿐이다. 그런데 30분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만큼 이 영화는 다 보고 난 뒤에 할 말이 정말 많은 영화였다.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디거」는 석유로 막대한 부를 쌓은 디거 록웰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영화다. 블랙 코미디로 소개된 작품이지만, 필자에게는 진지한 정치극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코믹한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물들의 행동은 과장되어 있고, 상황도 우스꽝스럽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가지는 않았다. 미국식 유머와 문화적인 거리가 있어서였을까. 적어도 내가 본 상영관에서는 다른 관객들의 웃음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루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보는 내내 눈을 떼기 어려웠다.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했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을 보면서 감독의 연출에도 놀랐다. 이제 슬슬 영화가 끝날 것 같다는 낌새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영화는 엔딩 크레딧까지 쉴 새 없이 질주했다.
영화가 끝난 뒤, 영화관을 나오며 나는 이 영화를 다 본 감상을 한 시라도 빨리 정리하고 싶었다. 디거라는 인물의 말과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그렇다. 디거는 우스꽝스러운 석유 부자이고, 풍자의 대상이며, 분명 비난받을 일을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다 보면 쉽게 나쁜 놈이라고만 말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불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영화를 다 본 뒤 그를 옹호하고 싶어졌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디거의 말이 맞게 들렸는데도, 나는 왜 그가 만든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 아래에는 「디거」의 주요 사건, 극중극 구성과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디거인줄 알았는데, 디거를 연기하는 배우였다
세트장이 보이고 나서야 알아차린 ‘극중극’ 구조

「디거」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어디에 속하는지, 영화가 시작한 지 약 30분 뒤에 비로소 알아차리게 된다는 점이었다.
「디거」는 표면적으로는 기후 디스토피아 상황을 대하는 ‘디거’의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영화 전체가 연극 무대와 그 뒤편의 이야기이고 그 안에 ‘디거’의 일화가 삽입되어 있는 극중극(Play within a play) 구조로 되어 있다.
나는 관객 입장으로서 분명 디거의 삶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가 보는 화면이 무대 세트장으로 변하더니 방금까지 하던 대화와 행동이 ‘연기’였음이 드러나는 장면은 영화 1막의 종료를 암시함과 동시에 굉장히 충격적인 반전으로 와닿는다.
‘그걸 어떻게 구분을 못 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 영화는 (아마 감독의 의도였겠지만) 그 경계가 생각보다 모호했다. 톰 크루즈의 얼굴이나 분장이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 디거였던 얼굴이 그대로 배우의 얼굴이다. 단순한 페이드-인-아웃이 전환될 때마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느낌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주변의 세트장이 눈에 들어오면 그제야 ‘아, 지금은 연극을 만들고 있는 쪽 이야기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극’과 ‘극중극’을 구분할 수 있는 장면 중 하나로 대표적으로 비행기 장면이 있다.
‘U.S. AIR FORCE’라고 적힌 동체 안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 그런데 주변 공간까지 보니 실제 비행기가 아니라 실내에 놓인 무대 장치다. 비행기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 사건을 연기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같은 인물과 공간을 보고 있었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졌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부분에서 감독의 기교에 감탄했다. 연극이라는 사실을 한 번 밝혀서 놀라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내가 보고 있는 인물과 장면을 계속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구성이었다.
특히 ‘디거’와 ‘디거를 연기하는 배우’가 동일한 톰 크루즈이다보니, ‘디거를 연기하는 배우’가 곧 ‘디거’라고 생각하며 영화를 보게 되는 점에서 그 흡입력과 몰입력이 더욱 배가되었던 것 같다.
배우가 고민하면 디거도 다르게 보였다

이 구조가 더 재미있었던 것은 배우의 고민이 그가 연기하는 ‘디거’를 보는 시선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디거를 연기하는 배우는 그를 그저 우스꽝스러운 부자로 표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멍청한 석유부자가 아니라, 때로는 멍청하지만 때로는 똑똑하고 용감하며 그건 지금 자신이 하는 연기와 정반대의 모습일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배우의 ‘에고’ 때문에 연출가는 디거의 배우와 사사건건 충돌한다.
“정말 그런가?”하고 디거의 말과 행동을 따라가다보면 은근히 그의 그런 복잡한 인물상을 보며 배우의 해석이 맞는 듯도 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디거’가 실제로 그런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디거 역할의 배우’가 실제로 그렇게 연기를 해서 그런게 아닌가하는 고민에 빠져든다. 그런 상황 자체가 내게는 이 작품의 블랙 코미디적이고 역설적인 포인트였다.
디거를 이해하고 완벽하게 재현하려는 배우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나도 디거를 이해하려고 하고 있었다.
디거의 소시오패스적인 사고방식과 그의 자본주의를 옹호하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영화는 디거라는 인물과 그를 연기하는 배우를 쉽게 떼어놓고 볼 수 있게 연출하지 않았다. 그래서 배우가 진지하면 자연스레 디거도 진지한 인물처럼 보였다.
필자에게 극중극 구성은 그런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감탄하게 하는 형식이면서, 동시에 인물에 대한 감정까지 바꿔놓는 장치처럼 느껴졌다.
디거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과연 올바른가
참치를 먹지 않겠다던 가네시 박사는 왜 마음을 바꿨을까

디거와 가네시 박사가 비행기 안에서 나누는 대화에서도 비슷한 의문이 생긴다.
기내에서 참다랑어 회가 나오자 가네시는 먹기를 거절한다. 참다랑어의 개체 수가 줄고 있다는 이유다. 디거가 참치를 먹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먹지 않으려고 한다는 취지로 답한다.
디거는 바로 그 표현을 붙잡는다. 먹지 않는 것과 먹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다르다. 후자라면 가끔은 먹는다는 뜻 아니냐는 것이다.
작은 말장난처럼 들리지만, 가네시의 태도를 흔들기에는 꽤 영리한 접근이었다. 자신의 원칙을 설명하던 사람이 어느새 그 원칙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해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대화는 생명을 보존하는 일과 삶을 즐기는 일로 이어진다. 디거는 생명을 지키는 데 헌신하느라 정작 자기 삶을 즐기는 것은 잊은 것 아니냐며 가네시를 자극하고, 가네시는 참치를 먹지 않아도 자신은 멀쩡히 살아 있다고 맞선다.
여기까지는 가네시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그런데 이후 디거는 이 참치가 어떻게 길러졌는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고기를 정성껏 돌보는 일본인 요리사 집안의 이야기로 기억한다. 그 사람이 참치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마사지까지 해주며 기른다는 것이다. 그냥 맛있는 참치가 아니라, 애정과 정성이 담긴 사연이 이 음식에 붙는다.
가네시는 결국 마지막 한 점을 먹는다.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듯, 황홀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자 디거는 이겼다는 듯, 사실 방금 한 이야기는 전부 개소리였다고 밝힌다. 가네시를 움직인 그 사연은 아마도 디거가 지어낸 픽션이었던 듯하다. 가네시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린다.
이렇게 보면 가네시의 모습이 우스워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환경을 생각해서 먹지 않겠다던 사람이, 듣기 좋은 이야기 하나에 결국 먹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에게 더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마음을 바꾸게 만든 트리거였다.
참치회가 달라진 것도 아닌데, 이야기가 붙자 가네시의 선택이 달라졌다.
그는 처음부터 먹고 싶었고, 디거의 이야기는 그 욕망을 허락해 줄 핑계가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디거가 굉장한 심리 전문가여서, 이야기가 붙으면 상대를 설득하기 쉽다는 설득의 심리학을 몸소 선보인 것일까.
어느 쪽인지 따져 보는 일마저 블랙코미디일지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디거가 원칙을 버리라고 윽박지르는 대신, 이 귀하게 자란 참치의 입장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듯한 그럴싸한 포장지를 건넸다는 점이다.
이 장면은 ‘오르톨랑(ortolan)’을 먹는 사람들이 신의 눈을 피하려고 냅킨을 머리에 뒤집어쓴다는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가네시에게 디거의 이야기는 그 냅킨이었다. 먹을 수 없다고 버티던 사람이 ‘귀하게 자란 참치’라는 흰 천을 뒤집어쓰고서야 황홀하게 한 점을 즐긴 셈이다. 가네시 개인의 일탈이라기보다, 겉으로는 환경 보호와 세계 평화를 논하는 이들이 어딘가에서는 떳떳하지 못한 일을 몰래 한다는 뉘앙스를 풍자하는 것으로 읽힌다.
앞서 필자는 배우의 해석과 연기를 따라가며 디거를 조금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가네시가 디거의 이야기를 듣고 같은 음식에 대한 판단을 바꾼다. 두 상황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어떤 설명을 먼저 듣느냐에 따라 대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점은 묘하게 닮아 있었다.
가네시가 듣기 좋은 이야기에 넘어갔다고 웃고 있는 필자도, 조금 전까지는 배우가 보여주는 디거를 따라 이해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이 장면의 풍자가 가네시 한 사람에게서 끝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디거를 이해하려는 배우와, 디거를 비웃어야 한다는 연출가
가네시가 디거의 이야기를 듣고 같은 참치를 다르게 받아들였다면, 무대 뒤에서는 디거에게 어떤 이야기를 입힐 것인지를 두고 다툼이 벌어진다.
디거를 연기하는 배우 커티스와 연출가 한나의 충돌이다.
커티스가 불만을 가진 것은 단순히 자기 연기에 간섭받는다는 사실만은 아니다. 자신이 조사하고 이해한 디거는 이렇게까지 단순하고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었다.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지만 영리한 면도 있고, 때로는 대담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연극에서는 그런 인물이 지나치게 납작한 희화화의 대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런 인물이 일으킨 재앙까지 가벼운 웃음거리처럼 다뤄지는 것에도 반발한다.
한나에게도 이유는 있다. 재난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그 일을 웃을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충돌은 세대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번진다. 한나는 커티스 세대가 세계를 망쳐놓았다는 취지로 맞선다.
그렇게 보면 둘은 처음부터 다른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커티스는 자신이 연기해야 할 인간을 보고 있다. 한나는 그 인간 때문에 고통받은 사람들이 앉게 될 객석을 보고 있다. 배우에게는 인물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하고, 연출가에게는 그 표현이 관객에게 무엇을 해주느냐가 중요한 셈이다.
이 차이를 생각하면 한나가 코미디를 고집하는 이유도 이해는 된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동안 필자의 마음은 계속 커티스 쪽으로 기울었다.
커티스는 딸의 안위를 걱정하며 아내와 연락한다. 무대에 서 있을 때는 디거이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면 자기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불안해하는 아버지다. 영화는 관객이 그의 걱정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가 연기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그러니 그가 인물을 진지하게 다루고 싶다고 말할 때, 그 진지함을 배우의 고집으로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반면 한나는 그를 제지하는 사람으로 다가왔다. 필자에게는 연극의 과장된 표현이 썩 재미있게 느껴지지도 않았기에, 코미디라는 이유로 지금의 방향을 계속 밀어붙이는 태도가 더 답답하게 보였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도 내 판단을 한번 되짚게 된다.
한나의 주장을 설명할 수는 있는데, 왜 감정은 계속 커티스에게 가는가. 커티스의 해석이 더 옳아서일까. 아니면 영화가 그의 사적인 걱정을 가까이 보여준 반면, 한나의 입장은 주로 그와 부딪치는 대화 속에서 받아들이게 했기 때문일까.
디거를 어떻게 연기해야 하느냐는 논쟁을 보고 있었는데, 정작 필자의 판단에는 디거와 상관없는 배우의 사정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렇다고 그런 감정이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가 누구를 더 이해하게 되는지가 어떤 장면을 보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 논쟁에 끼어드는 사람이 제작자 케니다. 그는 자신이 디거의 조카임을 밝히고, 자신이 알던 디거에게도 우스운 면과 진지한 면이 함께 있었다고 설명한다. 배우와 연출가 중 한쪽만 완전히 틀렸다고 정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대화의 방향을 디거라는 인물에서 이 연극을 보러 올 사람들로 옮긴다.
이쯤 되면 문제는 실제 디거가 어떤 사람이었느냐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지금 어떤 이야기를 필요로 하느냐는 문제까지 들어온다.
배우는 인물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 한다. 연출가는 관객이 웃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제작자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그 감정을 나눌 수 있다는 데 의미를 둔다.
그들 모두 같은 디거를 무대에 올리고 있지만, 무대 위의 디거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조금씩 달랐던 것 같다.
디거의 죽음에 환호하는 사람들

케니의 설명은 이후 극중 관객들의 반응과 이어진다.
그는 이 연극을 통해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망가진 세계를 향한 분노를 쏟아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 역시 연극을 보며 디거의 죽음에 다른 관객들과 함께 환호했다고 말한다.
디거의 조카인 사람까지 자기 삼촌의 죽음을 재현한 장면에 환호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연극이 왜 디거를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만드는지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이 공연에서 디거는 이해해야 할 역사적 인물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마음껏 미워할 수 있는 대상이기도 했다.
복잡한 인간을 보여주는 일과, 관객이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만드는 일은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커티스가 더 복잡하게 표현하려던 디거는 관객을 망설이게 할 수도 있다. 반대로 단순하고 우스운 디거는 비난하기 쉽다. 그가 몰락할 때 관객이 느끼는 통쾌함도 더 명확해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나가 고집하던 코미디와 케니가 설명한 공연의 목적은 서로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필자에게 디거의 죽음에 흥분하는 관객들의 모습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 사람들이 왜 화가 났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삶은 디거가 남긴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 누군가는 그 재앙으로 소중한 것을 잃었을 것이고, 그 분노를 함께 표현할 자리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막상 그 장면을 보니, 그들의 분노가 정당한지와 별개로 누군가의 죽음에 환호하는 모습 자체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필자에게는 그 순간 예수의 죽음을 둘러싼 성난 군중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디거가 무고한 희생자라는 뜻은 아니다. 그가 저지른 일을 지우고 구원자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자신들이 미워하는 사람을 향해 감정을 쏟아내는 군중의 모습이, 그 순간만큼은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어쩌면 극중 관객과 필자가 보고 있던 디거가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자기 세계를 망가뜨린 인물의 몰락이 펼쳐진다. 하지만 필자는 그 장면에 도착하기 전까지, 디거를 어떻게 연기할지 고민하는 커티스를 보았다. 디거의 항변을 들었고, 그를 단순한 바보로 표현해도 되는지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도 보았다.
그 과정에서 마음에 걸린 것들이 남아 있는데, 극중 관객은 거리낌 없이 환호한다.
그들이 비난하는 이유는 이해했지만,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디거의 죽음을 바라볼 수는 없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이상한 점이 있다. 디거의 몰락을 보여주는 이 공연에 돈을 대는 사람 역시 디거의 가족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만으로 케니의 의도를 악의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가족이 남긴 상처를 인정하고, 자신이 가진 자원으로 사람들에게 어떤 위안을 주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필자에게는 묘한 구도처럼 보였다. 무대 위에서는 디거가 조롱받고, 객석에서는 사람들이 그를 향해 분노한다. 그런데 그 분노가 펼쳐질 무대를 마련한 사람은 디거의 조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자유롭게 쏟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그들이 누구를 보고, 어떤 결말에서 환호하게 될지는 이미 연극 안에 준비되어 있다.
가네시에게는 참치를 먹을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극중 관객에게는 디거를 미워하고 그의 죽음에 환호할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가 있는 셈이다.
두 장면을 함께 생각해보니, 필자가 처음에 느꼈던 ‘영화가 비난하는 쪽까지 풍자한다’는 감상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리됐다.
단순히 저 사람들도 위선적이거나 어리석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떤 대상을 비난할 충분한 이유가 있더라도, 그 감정을 받아주는 이야기를 만났을 때 그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까지 살펴보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필자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배우의 입장에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관객들의 환호가 불편하다는 내 판단 또한, 영화가 보여준 이야기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 장면은 군중을 비난하고 끝내기에도 어딘가 찝찝했다.
청문회에서 디거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되묻는다
가네시가 진실을 말해도 디거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필자는 왜 디거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마음을 주지 못했을까.
그 이유를 이야기하려면 앞서 유럽의회에서 벌어진 장면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필자에게는 이른바 청문회 장면이 「디거」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가네시는 디거가 원하는 말을 해주지는 않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의회에서도 그는 석유 산업이 기후변화의 위험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대중과 정치권을 오도해왔다는 취지로 폭로한다.
디거에게 고용된 전문가가 그를 보호하는 대신, 그가 감추고 싶어 할 법한 사실을 공개하는 것이다.
이런 장면이라면 보통 그다음에는 폭로당한 인물이 당황하거나, 사실을 부인하거나, 증언자의 신뢰를 무너뜨리려고 할 것 같다. 그런데 디거의 대응은 달랐다. 그는 위험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인정이 곧 자신의 패배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돌린다.
그렇다면 너희는 내가 공급하는 에너지 없이 살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논쟁의 초점이 바뀐다. 무엇을 알고도 했느냐는 질문이, 그 일을 통해 누가 무엇을 누렸느냐는 질문으로 옮겨간다. 가네시가 드러낸 사실 자체를 뒤집기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방향을 바꾸려는 것처럼 보였다.
비행기에서 참치의 출처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던 디거가 떠오르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때는 좋은 사연을 붙여 가네시의 선택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비난받는 상황에 다른 설명을 붙인다. 탐욕스러운 자본가가 재앙을 일으켰다는 이야기 안으로, 그 자본가의 공급을 원했던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가네시가 사실을 드러냈다면, 디거는 그 사실을 누구의 책임으로 읽을 것인지를 다시 정하려는 것 같았다.
저렴한 연료와 빠른 배송을 원하는 사람들
디거의 연설이 쉽게 무시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추상적인 이야기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이 누리는 생활을 하나씩 거론한다. 저렴한 연료로 이동하고, 전등을 켜고, 냉난방을 사용하고, 싼 항공권으로 휴가를 떠나는 일.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까지 빠르게 배송받고, 휴대전화를 충전해 영상을 보는 일이다.
심지어 AI가 소비하는 에너지와, 그 AI에게 재난의 해결책을 묻는 모순까지 끌어온다.
내가 영화를 보며 인정하기 싫지만 맞는 말 같다고 느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디거가 말하는 생활은 어느 특별히 탐욕스러운 사람들만 누리는 것이 아니었다. 필자도 익숙하게 이용하고, 때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었다. 환경 문제를 걱정하는 것과 별개로, 물건은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고 냉난방은 충분히 되었으면 좋겠다.
그 편리함이 어디에서 오는지 매번 따져가며 살지는 않는다.
그런데 디거는 그 생활을 자기 사업의 근거로 제시한다. 내가 공급했지만, 너희가 원했다는 것이다. 시추를 멈추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에 대해서도, 정작 너희가 그 중단을 원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되받아친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며 느꼈던 불편함은 기억난다.
인정하기 싫지만 맞는 말 같았다.
디거가 돈을 벌고 싶어 했다는 것만으로 그 막대한 부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공급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생활이 그의 사업을 필요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를 비난하는 동안 안전하게 떨어져 있다고 느꼈던 내 위치도 달라졌다.
필자 역시 디거가 열거한 편리함을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공급하는 풍요를 누리는 사람과 그를 비난하는 사람이, 반드시 서로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머리에서 흐르는 검은 피는 무엇처럼 보였을까
디거의 머리에서 피가 나는 장면은 영화 도중 두 번 등장한다. 하나는 청문회 도중 날아온 무언가를 맞고 흘리는 피. 그리고 또 하나는 연극이 끝나고 다른 배우들이 디거의 머리에 묻히는 ‘검은 피’다.
물론 사람이 피를 흘리면 피는 ‘붉다’. 그런데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연기를 모두 마친 ‘커티스’의 머리에 다른 배우가 발라주는 액체의 색은 ‘검다’. 하지만 인상깊었던 쪽은 바로 ‘검은 피’였다. 청문회에서 상처 입은 디거의 얼굴과, 공연 뒤 커티스의 머리에 발라지는 검은 액체가 필자에게는 겹쳐 보였다. 앞선 상처가 그를 공격받는 사람으로 바라보게 했다면, 뒤의 검은색은 그가 어떤 사업으로 부를 쌓았는지 다시 떠올리게 했다.
석유를 팔아 부자가 된 사람을 넘어, 마치 몸속에도 석유가 흐르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할까.
그렇게 보면 상당히 노골적인 풍자다. 그런데 상처 입은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서 있는 모습에서는 또 다른 이미지도 떠올랐다.

ⓒwww.nbcwashington.com
2024년 미국 대선 유세 도중 피격당한 트럼프였다. 오른쪽 귀를 다친 뒤 얼굴에 피가 흐르는 상태에서 주먹을 들어 올리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냐리투 감독이 그 장면을 의도적으로 참조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필자에게는 비난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상처 입은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다른 감정이 끼어든다는 점에서 두 이미지가 겹쳐 보였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있었다는 사실과,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다쳤다는 사실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피를 흘리는 얼굴은 논쟁의 내용과 별개로 시선을 붙든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 생각하던 중에도, 공격받고 상처 입은 사람의 모습이 먼저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디거의 경우에는 그 피가 석유처럼 보였다는 점 때문에 인상이 더욱 복잡했다.
상처는 그를 인간적으로 보게 하는데, 검은색은 다시 그가 어떤 인물인지 떠올리게 한다. 불쌍하다고 느끼기에는 그의 사업과 재앙이 마음에 걸리고, 탐욕의 상징으로만 보기에는 눈앞의 상처와 그의 항변이 남는다.
필자에게 검은 피는 디거를 비난하게 만드는 이미지이면서, 그를 비난하는 마음만으로 바라보기 어렵게 하는 이미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트럼프를 떠올렸다는 말도 디거가 곧 트럼프라는 뜻은 아니다. 상처 입은 인물의 모습이 그 사람에 대한 판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순간 필자의 시선이 어디로 움직였는지를 설명하는 데 더 가까울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이런 모습으로 연설하는 디거는 처음 보았던 우스꽝스러운 부자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외형이나 행동이 갑자기 점잖아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과장되어 있고,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 밀어붙인다. 그런데 그 과장된 말 속에 쉽게 반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자신의 부가 어디에서 왔는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 욕망이 자신의 사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게 보니 커티스가 디거를 단순한 바보로 연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이유도 조금 더 이해가 됐다.
디거는 자기에게 유리한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자기에게 유리한 말이라고 해서 그 내용이 전부 거짓인 것은 아니다. 상대의 모순을 정확히 짚는 능력과, 그 모순을 이용해 자기 책임을 피하는 태도는 같은 사람 안에 있을 수 있다.
필자는 이 장면을 보면서 그 둘을 한꺼번에 느꼈던 것 같다.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 있다. 그러다가도 지금 이 사람은 무엇에 답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편리함을 원한다는 말은 맞을 수 있지만, 위험을 알고도 어떤 선택을 했느냐는 질문에 충분히 답한 것일까.
디거의 항변에 일리가 있다는 것과, 그 항변으로 책임이 사라진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이 둘을 지금처럼 쉽게 나눠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말에 설득되는 만큼,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분노가 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모습까지 겹치니, 어느 순간에는 그가 몰아세워지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감정이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필자에게는 불편하면서도 흥미로웠다.
함께 소비했다고 해서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디거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가는 그 자리에 있는 똑똑한 사람들조차도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디거의 연설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은, 사람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책임의 크기까지 같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이는 것일 듯하다.
소비자가 편리함을 원했다는 사실과, 위험을 알고도 사업을 계속하기로 결정한 사람의 책임은 같을 수 없다. 어떤 정보를 공개할지, 어떤 경고를 받아들일지,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에 관한 권한도 서로 다르다.
가네시가 폭로한 것 역시 단순히 사람들이 석유를 많이 소비한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 위험을 알고 있던 기업들이 대중의 판단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느냐는 문제였다.
그런데 디거는 사람들이 지금의 생활을 원한다는 사실을 앞세워,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 역시 그 체계 안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말은 관객인 필자를 돌아보게 한다. 동시에 디거에게 향하던 질문을 흐리게 만들 수도 있다.
내 생활에도 모순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그러니 디거에게 더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영화 속 디거의 연설은 그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장면은 디거의 말이 옳으냐 그르냐만으로 정리되지 않았다.
필자도 석유재벌이 제공한 편리함을 원한다. 저렴한 가격의 물건과 서비스를 원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내린 선택을 전부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를 비난하는 군중의 태도는 불편하다. 그렇다고 그 불편함이 그의 책임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머릿속으로는 구분할 수 있는 것들이, 연기와 연설과 이미지로 함께 들어오니 쉽게 분리되지 않았다.
이때까지 필자는 디거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는 마지막에, 그 모든 파국이 끝나고 마침내 잔잔해진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도시의 모습을 비춘다.
그 풍경을 보고 나니, 디거의 항변에 고개를 끄덕였던 필자도 그가 남긴 결과를 다시 바라보게 됐다.
푸른 연무에 잠긴 도시에 붉고 뚜렷한 Digger라는 이름이 마치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마스크를 쓰던 시절은 얼마 전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런데 이 마지막 풍경에서 필자가 오래 바라보게 된 것은 망가진 도시만이 아니었다.
그곳을 담담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극장을 나선다. 처음 겪는 재난에 놀라 허둥대는 모습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생활이고, 오늘은 그저 연극 한 편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 것이다.
그 모습을 보니 몇 년 전 코로나 시기의 생활이 떠올랐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다녔던 시간. 사람을 마주하고 있어도 얼굴의 절반이 가려져 있었고, 누군가와 만나고 이야기하는 일에도 여러 제약이 따랐다. 언제쯤 끝날지 알 수 없어서 더 갑갑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낯설고 불편했던 일들이 어느 순간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외출할 때 마스크를 챙기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그때의 상황부터 살피게 됐다. 불편함이 사라진 것은 아닌데, 그 불편함을 감안하며 하루를 보내는 데는 익숙해졌다.
나도 그렇게 지냈다.
그래서 영화 속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는 모습이 낯설게만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망가진 세계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가겠구나 싶었다. 지금의 필자에게는 끔찍하게 보이는 환경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일 마주하는 현실일 것이다.
어쩌면 필자가 더 갑갑하게 느꼈던 것도 그 담담함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재난이 닥치는 순간에는 그것을 막거나 피하는 일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재난 속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에게는 오늘 하루를 보내는 일도 중요하다. 그 안에서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가끔은 연극을 보러 갈 것이다.
영화 속 관객들이 조금 전까지 연극에 몰입하고 디거의 죽음에 환호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일상을 살고 있었기 때문일 듯했다.
불편한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본 적이 있어서, 그들의 담담함이 오히려 더 가까이 느껴졌다.
그런데 영화 속 세계에서는 그 원인제공자가 ‘디거’라는 명확한 인물이었으니 그 증오감과 적대감은 상당했을 것이다.
물론 코로나 시기의 생활과 영화 속 디스토피아가 같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마스크를 쓴 채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 전까지 내가 살았던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때의 갑갑함에서 많이 벗어나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활이 다시는 찾아오지 않으리라고 자신할 수는 없다.
그런 미래에서도 살 수는 있겠지만

아마 영화 속 세계가 현실이 되어도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처음에는 견디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에도 조금씩 익숙해질 테고, 달라진 환경 안에서 각자의 생활을 만들어갈 것이다. 영화 속 사람들처럼 마스크를 쓰고 극장에 가는 날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살 수 있다고 해서, 그런 미래를 맞이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 생각이 들고 나니 청문회에서 들었던 디거의 항변도 다시 떠올랐다. 사람들이 원했고, 자신은 공급했으며, 모두가 그 혜택을 누렸다는 말이다.
영화가 끝났다고 해서 그 말에서 일리가 있다고 느꼈던 부분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필자 역시 편리한 생활을 원하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 매번 따져가며 살지는 않는다. 디거를 향해 분노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불편했다는 감상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남은 세계가 이렇다면, 그의 설명만으로 납득할 수 있을까.
그가 사람들의 욕망을 정확하게 짚었다는 사실이,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내린 선택까지 정당하게 만들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의 편리함을 원했던 사람들도 그것을 누린 끝에 이런 생활이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테니까.
디거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가 남긴 세계까지 받아들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필자에게 마지막 장면은 디거를 다시 나쁜 사람으로 정리해주는 결말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더 불편한 질문이었다. 그의 말에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였던 나에게, 그렇다면 그 선택들이 이어진 미래도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런 세계에 적응해서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그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 자체를 맞이하고 싶지 않다.
정리하는 글
영화에 관한 해석이, 코로나라는 과거와, 불투명한 미래까지 생각나게 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여자친구와 나눈 대화가 길어진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디거라는 인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하다 보면, 그를 연기하는 배우와 연출가의 충돌을 이야기하게 된다. 그 충돌을 생각하다 보면 디거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걸리고, 청문회에서 그가 한 말을 되짚다 보면 내 생활도 떠오른다.
마지막에는 마스크를 쓰던 시기의 기억까지 따라왔다.
처음에는 톰 크루즈가 낯선 분장을 하고 등장하는 영화에 관심이 갔다. 그런데 다 보고 나니 배우의 변신보다도, 그 배우가 연기한 인물에게 내가 어떻게 설득되고 어떻게 거리를 두게 되었는지가 더 오래 남았다.
분명 중간까지는 디거에게 마음이 기울기도 했다. 청문회에서 그가 열거한 편리함은 필자도 매일 누리는 것들이었다. 그 말을 듣는 동안에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분노가 지나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연극이 끝나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극장 밖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니, 조금 전까지 고개를 끄덕였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디거는 사람들이 원했기 때문에 자신이 공급했다고 말했다. 그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공급한 것에 기대어 살아온 끝에, 사람들이 이제는 마스크 없이는 거리로 나서기 어려운 세계에 살고 있다면 어떨까.
코로나 시기에도 우리는 불편함에 익숙해지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래서 영화 속 사람들도 결국은 저곳에서 살아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필자는 그들에게 익숙해진 현실을 내 미래로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영화는 디거의 말에 반박할 대사를 대신 들려주지 않는다. 사람들이 극장을 나서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도 청문회에서 느꼈던 불편한 수긍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그 말만 듣고 디거를 판단할 수 없게 됐다.
필자가 「디거」를 좋게 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스꽝스럽게 보이던 인물의 말에 한 번쯤 귀를 기울이게 하고, 마지막에는 그 말을 들은 내가 어떤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지 돌아보게 했다.
영화관을 나와 여자친구와 계속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디거가 틀렸다고 말하고 끝내기에는 그의 항변이 마음에 남았고, 맞는 말이었다고 결론 내리기에는 극장 밖 풍경이 너무 선명했다.
덧붙임: 그래서 볼 만한가?
필자에게는 충분히 볼 만한 영화였고, 보고 나서의 만족감도 컸다.
다만 블랙 코미디라는 소개에서 기대할 만한 웃음과는 거리가 있었다. 적어도 필자는 가볍게 웃으며 보기보다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따라가며 계속 생각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과정이 지루하지 않았다.
톰 크루즈의 연기에 눈이 갔고, 무대와 그 뒤편을 오가는 연출에 감탄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계속 따라가다 보니, 이제 끝나겠다는 낌새조차 느끼지 못한 채 마지막 장면에 도착해 있었다.
보고 나서 할 말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디거」는 보는 동안에도 몰입했고, 극장을 나와서도 그 안에서 보았던 것들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친구와 돌아오는 길에 영화 이야기만으로 30분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글로 정리하고 나서도, 그때 나눈 대화가 너무 짧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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