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글
최근 회사에서 꽤 인상적인 발표를 하나 봤다.
신규 콘텐츠를 설명하는 자리였는데, 담당 기획자가 평소처럼 기획서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 간단한 HTML 프로토타입을 함께 만들어왔다.
대단한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버튼을 누르면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고, 조건에 따라 몇몇 기능이 켜졌다 꺼지는 정도였다. 몇 번 눌러보면 엉성한 부분도 금방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해는 이상할 만큼 빨랐다.
기획서를 여러 장 넘겨가며 “이 조건에서는 여기로 이동하고, 이 경우에는 이 기능이 비활성화됩니다”라는 설명을 듣는 것보다 버튼을 두세 번 눌러보는 편이 훨씬 직관적이었다.
무엇보다 그 사람이 무엇을 만들고 싶어 하는지가 눈앞에 보였다.
사실 이런 기획자는 예전에도 있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기획자는 직접 러프를 그렸고, 엔진을 잘 다루는 사람은 간단한 화면이나 기능을 만들어왔다. 코딩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생각한 동작을 구현해서 보여주기도 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부러운 마음이 있었다.
기획서를 아무리 잘 써도 내가 머릿속에서 보고 있는 것을 그대로 전달할 수는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머릿속의 것을 다른 사람이 직접 보고 만져볼 수 있는 형태까지 만들어냈다.
다만 그런 능력에는 늘 별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그림을 배워야 했고, 엔진을 익혀야 했고, 코드를 쓸 줄 알아야 했다.
최근 AI와 바이브 코딩을 보면서 흥미롭게 느낀 것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그 문턱이 빠르게 낮아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게임 기획자가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지금까지 기획자의 대표적인 산출물은 기획서였다.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규칙과 구조로 정리하고,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문서로 풀어내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앞으로도 기획자의 생각을 반드시 문서로만 보여줘야 할까.
기획서 옆에 직접 눌러볼 수 있는 프로토타입이 놓일 수도 있다. 반복적으로 데이터를 확인해주는 작은 검사기를 붙일 수도 있고, 복잡한 퀘스트 구조를 한눈에 보여주는 시각화 도구를 만들어 함께 설명할 수도 있다.
나는 요즘 AI가 기획자의 일을 대신한다는 이야기보다 이 변화에 더 관심이 간다.
AI가 기획자가 자신의 생각을 형태로 만드는 범위를 넓히고 있다는 것.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바이브 코딩도 그 연장선에 있다.
바이브 코딩이 게임 기획자에게 필요한 까닭
바이브 코딩이란?
안드레 카파시는 자신이 ‘바이브 코딩’이라고 부른 작업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냥 대화만 해서 키보드를 거의 만지지 않아요. ‘사이드바 패딩을 반으로 줄여줘’ 같은 요청을 하고, 에러 메시지가 나오면 그냥 복사해서 붙여넣기만 하면 보통 그게 해결해줘요. […] 사실상 코딩이 아니라, 그냥 물건을 보고, 말하고, 실행하고, 복사 붙여넣기만 하는 거예요. 그리고 대부분 잘 작동해요.”
— Andrej Karpathy, X 게시물 번역
표현만 보면 꽤 과격하다.
실제로 같은 글에서 카파시는 더 이상 diff를 제대로 읽지 않는다거나, LLM이 버그를 고치지 못하면 이것저것 바꿔달라고 하다가 문제가 사라지면 넘어간다는 이야기까지 한다.
실제 서비스에 들어가는 코드를 이런 방식으로 다루는 것은 당연히 위험하다.
하지만 내가 흥미롭게 본 것은 그 과격함 자체가 아니었다.
예전에는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먼저 코드를 쓸 줄 알아야 했다. 문법을 배우고, 필요한 기능을 찾아보고, 직접 구현한 다음 오류가 나면 원인을 추적해야 했다.
바이브 코딩에서는 그 순서가 조금 달라진다.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말한다.
결과를 실행해본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설명하고, 에러가 나면 그것을 보여준 뒤 수정을 요청한다.
코드는 여전히 존재한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이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모든 코드를 직접 작성해야 했던 문턱은 크게 낮아졌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더라도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설명할 수 있고, 나온 결과가 자신의 의도와 같은지 판단할 수 있다면 작은 프로그램이나 프로토타입 정도는 직접 만들어볼 수 있는 환경이 열린 것이다.
기획자는 원래부터 구조를 정의하는 사람이다
게임 기획자가 하는 일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전투를 만드는 사람도 있고, 경제 시스템을 설계하는 사람도 있고, 레벨이나 퀘스트, 시나리오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조금 넓게 보면 공통점이 있다.
기획자는 목표를 정하고, 조건을 정하고, 상태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설계하고, 그 결과와 예외를 정의한다.
전투 시스템을 만든다면 어떤 조건에서 스킬이 발동하고 무엇이 영향을 받는지 정한다.
경제 시스템이라면 재화가 어디에서 들어와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설계한다.
퀘스트를 만든다면 언제 시작되고, 무엇을 해야 완료되며, 그 결과 게임의 상태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정의한다.
글을 쓰는 일이 중심처럼 보이는 내러티브 기획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의 퀘스트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계속 조건을 확인해야 한다.
이전 퀘스트를 완료했는가.
특정 NPC와 대화했는가.
어떤 선택지를 골랐는가.
필요한 플래그가 활성화됐는가.
그 결과 어떤 대사와 퀘스트가 새로 열리는가.
게임 속 이야기는 좋은 문장을 쓴다고 저절로 작동하지 않는다.
조건과 상태, 분기와 결과가 서로 맞물려야 비로소 플레이어가 하나의 이야기로 경험할 수 있다.

최근 읽은 《기획자의 시대가 온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흐름을 그리기 전에 입력과 출력부터 정의하는 것입니다. […] 진짜 프로젝트를 살리는 것은 예외를 다루는 방식입니다.”
— 위 책, 본문 ‘그림과 코드의 간극’ 中
읽다 보니 내가 기획서를 쓸 때 반복해온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엇이 들어오는지 정한다.
어떤 조건에서 무엇이 바뀌는지 정한다.
정상적인 흐름뿐 아니라 예외를 생각한다.
그리고 원하는 결과가 나오도록 구조를 만든다.
바이브 코딩이 게임 기획자에게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획자가 평소 문서 안에서 해오던 구조적인 사고를, 작동하는 형태로 옮길 수 있게 해주는 도구에 더 가깝다.
예전에는 그 구조를 기획서나 플로우차트로 설명했다면, 이제는 필요할 때 직접 움직이게 만들어볼 수도 있다.
내러티브 기획자와 바이브 코딩
기능 구현이나 구조 설계라는 말을 들으면 바이브 코딩은 시스템 기획자나 데이터를 많이 다루는 직군에게 더 필요한 기술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내러티브 기획에도 의외로 반복적인 검증 작업이 많다.
대사 데이터에서 값이나 태그가 빠진 곳을 찾아야 할 수도 있다.
특정 퀘스트에서 사용하는 플래그가 실제로 어디에서 생성되고 어디에서 참조되는지 확인해야 할 수도 있다.
조건과 분기가 많아진 퀘스트의 전체 흐름을 한눈에 보고 싶을 때도 있다.
물론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LLM에 데이터를 붙여넣고 “문제가 있는지 찾아줘”라고 물어볼 수도 있다.
한두 번이라면 그게 가장 빠르다.
문제는 같은 일을 계속 반복할 때다.
매번 파일을 열고, 필요한 범위를 골라 복사하고, 프롬프트를 쓰고, 나온 결과를 다시 확인한다.
어느 순간 AI에게 일을 시키는 과정 자체가 또 하나의 반복 업무가 된다.
그럴 때는 처음에 조금 시간을 들여 자신의 업무 방식에 맞는 작은 도구를 하나 만들어두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파일을 넣으면 누락된 데이터를 찾아주는 검사기.
플래그를 검색하면 어디에서 생성되고 사용되는지 보여주는 도구.
퀘스트 데이터를 읽어 전체 흐름을 노드로 펼쳐주는 도구.
바이브 코딩의 장점은 꼭 거창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사람이 반복하기에는 귀찮고, 자주 발생하고, 그러다 보니 실수하기 쉬운 일을 하나씩 떼어내는 것.
그 정도로도 충분히 쓸모가 있다.
기획서 다음의 기획
기획서를 쓰는 것에서, 직접 보여주는 것으로
앞에서 이야기한 HTML 프로토타입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획서와 프로토타입은 비슷한 것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여도 전달하는 방식이 다르다.
기획서는 규칙을 설명하는 데 강하다.
어떤 조건에서 기능이 동작하고, 어떤 예외가 있으며, 어떤 데이터를 필요로 하는지 기록하기 좋다.
반면 프로토타입은 사용자가 그 규칙을 실제로 경험하게 만든다.
“이 버튼을 누르면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라고 듣는 것과 버튼을 눌러 다음 화면을 보는 것은 받아들이는 감각이 다르다.
그러다 문득 기획자의 산출물을 꼭 ‘기획서’라고만 불러야 할까 싶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기획서를 쓰는 이유도 기획서라는 형식 자체가 필요해서라기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문서의 형태보다, 머릿속에 있던 것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고 검증할 수 있는 상태까지 끌어내는 일이 아닐까.
오랫동안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가장 쉽고 저렴한 수단이 문서였고, 그래서 우리는 기획서를 써왔다.
이제는 그 옆에 다른 선택지가 하나씩 생기고 있다.
작은 프로토타입으로 먼저 검증하기
게임 개발의 흐름을 아주 단순하게 줄이면 대략 이런 모습일 것이다.
아이디어 → 기획서 작성 → 리뷰 → 개발 전달 → 구현 → 빌드 확인
익숙한 과정이다.
문제는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데 있다.
문서에서는 문제가 없어 보였던 기능도 막상 구현해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튀어나온다.
조건이 꼬일 수 있다.
예외 처리를 빠뜨렸을 수도 있다.
화면 흐름이 번거롭거나, 사용해보니 기능 자체가 너무 복잡할 수도 있다.
오류가 있다는 사실보다 더 아쉬운 것은 그런 문제를 본 개발이 끝난 뒤에야 발견하는 경우다.
바이브 코딩을 이용한 프로토타이핑은 이 확인 시점을 조금 앞으로 당길 수 있다.
아이디어 → 작은 프로토타입 → 직접 검증 → 수정 → 팀 리뷰 → 본 개발
기획자가 실제 게임에 들어갈 시스템을 직접 만들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본격적인 구현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정의한 것이 정말 내가 생각한 대로 움직이는지 가장 싼 형태로 한번 시험해보자는 것이다.
《기획자의 시대가 온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완성된 시스템을 기다리지 말고, 작은 프로토타입이나 작은 데이터 샘플로 확인부터 하는 것입니다.”
— 위 책, 본문 ‘그림과 코드의 간극’ 中
직접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보면 여기에서 한 가지를 더 발견하게 된다.
프로토타입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오류만이 아니다.
머릿속이나 문서 안에서는 그럴듯했던 기획 자체의 복잡성도 함께 드러난다.
문장 몇 줄로 쓸 때는 단순해 보였던 기능이 실제로 눌러보니 너무 많은 단계를 요구할 수도 있다.
플로우차트에서는 깔끔했던 구조가 실제 화면에서는 사람이 따라가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조건을 전부 화면에 펼쳐놓는 순간, “내가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나?” 싶은 장면을 만나기도 한다.
프로토타입이 복잡성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서 안에 숨어 있던 복잡성을 눈앞에 펼쳐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빠르게 만드는 것만큼 빠르게 고치고, 필요하다면 버릴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기획이 틀렸다면 가능한 한 싼 단계에서 틀렸다는 것을 아는 편이 낫다.
기획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앞으로 기획서를 쓰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프로토타입과 기획서는 잘하는 일이 다르다.
프로토타입은 사용 흐름과 인터랙션을 빠르게 보여주는 데 좋다.
반면 상세한 규칙과 예외 조건, 데이터 구조와 정책, 변경 이력을 남기는 일에는 여전히 문서가 훨씬 편하다.
프로토타입에서 버튼 하나가 잘 작동한다고 해서 그 기능에 존재하는 모든 조건과 예외를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몇 달 뒤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찾아봐야 할 때도 있고, 구현된 결과가 처음 합의했던 내용과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기록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프로토타입과 기획서는 서로를 대체하는 관계라기보다 역할을 나눠 갖는 관계에 가깝다.
다만 앞으로는 둘의 비중이 조금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초기 리뷰에서 긴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대신, 작은 프로토타입을 먼저 눌러본 뒤 필요한 규칙을 문서에서 확인하는 편이 더 좋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아이디어를 설명하기에 문서보다 좋은 방법이 있다면 굳이 문서만을 고집할 이유도 없다.
기획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기획서만이 기획자의 유일한 산출물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직접 만드는 것과 혼자 만드는 것은 다르다
여기에는 분명한 경계도 있다.
몇 번 버튼을 눌러볼 수 있는 HTML 프로토타입과 실제 게임에 들어가는 시스템은 전혀 다른 물건이다.
실제 개발에서는 성능과 안정성, 기존 시스템과의 연동, 데이터 구조, 확장성, 유지보수처럼 프로토타입 단계에서는 대충 넘어갈 수 있었던 문제들이 중요해진다.
AI가 만들어준 코드 역시 마찬가지다.
실행된다고 해서 잘 만들어진 코드라는 뜻은 아니다.
자신이 제대로 검증하지 못하는 코드를 그대로 프로젝트에 넣는 것은 위험하다. 회사 내부의 기획서나 미공개 데이터를 외부 AI 서비스에 입력할 수 있는지도 조직의 정책부터 확인해야 한다.
개인이 만든 작은 도구가 늘어나는 것도 무조건 좋은 일만은 아니다.
반복 업무를 줄이려고 만든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만 이해하고 수정할 수 있다면, 문제를 해결한 게 아니라 다른 형태의 사일로를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만든 사람이 떠났다고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도구라면, 결국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한 사람에게 묶어둔 셈이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기획자가 어디까지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다.
《기획자의 시대가 온다》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이 경계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어디까지 직접 하고 어디서 협업할 것인가’입니다.”
“어디까지 직접 하느냐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목적의 문제입니다.”
— 위 책, 본문 ‘어디까지 직접 하고, 어디서 협업할 것인가’ 中
나는 이 표현이 꽤 마음에 들었다.
기획자가 무언가를 만드는 이유는 개발자의 일을 대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생각한 것을 더 빨리 확인하고, 다른 사람에게 더 정확하게 보여주고, 조금 더 구체적인 상태에서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이건 개발자와의 협업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아트를 글로 설명하다 보면 “조금 어둡지만 음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거나 “동양 판타지이지만 지나치게 전통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한다”는 식의 문장을 쓰게 된다.
쓴 사람의 머릿속에는 꽤 구체적인 그림이 있다.
문제는 그 글을 읽은 사람이 같은 그림을 보고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비슷한 레퍼런스를 여러 장 찾아 붙이거나 직접 러프를 그렸다. 이제는 생성형 AI로 대략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최종 결과물이 이 이미지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하는 방향은 이쪽에 가깝다.”
라고 보여줄 수도 있다.
여기에서도 AI 이미지 자체가 결과물일 필요는 없다.
서로 다른 머릿속에 있던 것을 조금 더 구체적인 상태에서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만으로 역할은 충분하다.
도구가 늘어난다고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엇을 만들고, 어디서 멈추고, 언제 다른 사람과 함께 만들어갈지 판단하는 일이 더 중요해진다.
글을 마치며
내 시간을 되찾는 일
《기획자의 시대가 온다》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문장은 이것이었다.
“내 일상과 업무에서 반복적으로 시간을 잡아먹는 것, ‘누군가가 해주면 좋겠는데’ 결국 내가 끝까지 떠안는 것, 그 불편함의 꼭짓점을 하나씩 찔러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생활코딩’입니다. 생활코딩은 결국 ‘코드를 배우는 일’이 아니라 ‘내 시간을 되찾는 일’입니다.”
— 본문 ‘거창한 프로젝트는 필요 없다’ 中
‘내 시간을 되찾는 일.’
이 표현이 특히 마음에 남았다.
나 역시 팀 리더를 맡았을 때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주말에도 출근하며 일했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눈앞에 있는 것을 하나씩 처리하기에도 급급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을 모두 게임을 더 재미있게 만드는 데 사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팀을 관리해야 했다.
방향을 정리해야 했다.
오래된 문서를 최신 상태로 유지해야 했고, 여러 곳에 흩어진 논의의 히스토리를 다시 찾아 정리해야 했다.
예전에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찾아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을 썼다.
물론 그런 일들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해야 했다.
문제는 그 ‘누군가’가 계속 나였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어도 왜 이런 구조가 만들어졌는지, 예전에 어떤 논의를 했는지, 지금 무엇을 유지해야 하는지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나인 경우가 많았다.
결국 가장 많은 맥락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은 반복 업무까지 떠안게 된다.
바이브 코딩이 이런 문제를 모두 해결해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예전에는 “사람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 중 일부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볼 수 있는 선택지는 생겼다.
매번 손으로 확인하던 데이터를 대신 검사해주는 도구일 수도 있다.
여러 문서에 흩어진 내용을 한곳에 모아주는 작은 페이지일 수도 있다.
매번 30분씩 걸리던 일을 버튼 한 번으로 줄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하루의 10분, 30분을 하나씩 되찾을 수 있다면 언젠가는 그 시간을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창조적인 일에 다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코딩이라는 문턱을 넘어보기

나 역시 예전에 Claude Code를 이용해 노드 기반의 퀘스트 기획 도구를 만들어본 적이 있다.
시작은 단순한 불편이었다.
퀘스트를 기획할 때는 엑셀이나 스프레드시트에 데이터를 직접 입력한 뒤 엔진에서 결과를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
전체 흐름을 설명해야 할 때는 별도의 플로우차트를 만들거나 손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퀘스트가 단순할 때는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조건과 분기가 늘어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스프레드시트만 보고 전체 흐름을 파악하기가 어려워지고, 다른 부서에 “여기에서 갈라졌다가 왜 다시 이곳에서 합쳐지는지” 설명하는 일도 점점 번거로워진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다.
데이터를 입력하면서 동시에 전체 퀘스트의 흐름을 노드로 볼 수 있다면 어떨까.
스프레드시트와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고, 내부 데이터는 JSON으로 저장해 버전 관리와 diff, merge까지 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만들기 시작한 뒤부터였다.
노드는 어떻게 연결할지, 내용이 길어진 노드는 어디까지 보여줄지, 화면에 노드가 많아졌을 때 어떻게 이동할지.
처음에는 퀘스트 기획을 편하게 하려고 만들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퀘스트보다 노드 기반의 툴을 어떻게 써야 덜 불편한가를 더 오래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도 하나 발견했다.
나는 처음에 노드로 시각화하면 복잡한 퀘스트도 훨씬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맞았다.
어떤 퀘스트가 어디에서 갈라지고 다시 어디에서 합쳐지는지 한눈에 보기 쉬웠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데에도 스프레드시트보다 훨씬 편했다.
하지만 내가 기획하고 있던 디테일을 하나씩 화면에 넣기 시작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조건과 예외, 데이터와 부가 정보를 모두 보여주려고 하니 노드 역시 빠르게 복잡해졌다.
시각화했는데도 복잡했다.
처음에는 툴이 잘못된 줄 알았다.
그런데 곰곰이 보다 보니 꼭 툴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내가 만든 구조 자체가 복잡했던 것이다.
시각화한다고 해서 복잡한 기획이 자동으로 단순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만든 구조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더 솔직하게 보여줄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다시 기획의 문제로 돌아왔다.
이 화면을 보는 사람에게 지금 정말 필요한 정보는 무엇인지.
어떤 조건은 반드시 보여줘야 하고, 어떤 조건은 숨겨도 되는지.
지금 협업 부서와 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어떤 내용은 과감하게 생략해도 되는지.
툴을 만들면서 오히려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지 정하는 것 역시 기획이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 경험 이후 내가 바이브 코딩을 보는 시선도 조금 달라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기획자가 작은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 수 있게 해주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무언가를 만들어보면 내 생각을 검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문서에서는 별문제 없어 보였던 구조를 실제 형태로 펼쳐볼 수 있고, 복잡하다면 복잡하다는 사실을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지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계속 반복하면서 시간을 빼앗기던 문제 중 일부는 작은 도구로 떼어낼 수도 있다.
기획자가 반드시 프로그래머가 될 필요는 없다.
AI가 기획자를 개발자로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동안 머릿속이나 문서 안에서만 다뤘던 것을 실제 형태로 만들어보고, 조금 더 일찍 확인하고, 조금 더 구체적인 상태에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더 생겼다.
앞으로 좋은 기획자를 가르는 기준이 얼마나 많은 것을 혼자 만들 수 있느냐는 아닐 것이다.
무엇을 직접 만들어볼 것인지.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무엇은 과감히 생략할 것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만들어갈 것인지.
어쩌면 그것이 기획서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또 다른 기획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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