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글
새 회사에 입사한 뒤, 가장 크게 변화한 점은 바로 기획서를 피드백 받는 방식이었다.
이전에는 기획서를 상사나 사수에게 전달하고 피드백을 받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지금 회사에서는 자신이 작성한 기획서를 여러 팀원 앞에서 직접 발표하고, 그 자리에서 대략적인 방향성이 크게 어긋나지 않으면 통과되는 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문서를 잘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그 문서의 내용물을 잘 피칭하는가 또한 중요해졌다.
나는 디테일한 문서를 잘 쓰는 사람이었다.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면 그 결론이 나온 이유가 있어야 하고, 캐릭터의 행동에는 그에 맞는 동기가 있어야 하며, 설정과 사건 사이에는 논리적인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발표를 전제로 문서를 설계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서만 놓고 보면 나름대로 성실하게 작성한 기획서였다. 설명해야 할 전제가 많았고, 예상되는 의문에 미리 답하려다 보니 글도 빽빽해졌다. 그러다 보니 내가 쓴 기획서는 대체로 길어질 수밖에 없었던 거다.
발표를 하는 상황이 되자, 발표자인 나와 그것을 듣는 청자 양쪽 모두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긴 문장과 고유명사를 읽으면서 나는 청자들의 지루해하는 표정을 읽었음에도 발표를 멈출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나의 발표 어딘가에서 어떠한 재미나 매력을 찾고자 노력했으리라.
누구도 만족스럽지 않은 발표가 끝나고, 나의 기획안은 몇 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자는 결론으로 귀결되곤 했다.
회의에서 반복해서 나온 질문은 비슷했다. 설정은 이해되지만 이 그룹이 왜 재미있는지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것. 캐릭터들이 함께 있을 때 어떤 장면이 나오는지, 유저가 처음 보자마자 느낄 차이가 무엇인지 보여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피드백이 들어올 때마다, 그러한 요청사항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그 요청사항을 답하기 위한 ‘상세 페이지’를 따로 준비하는 식으로 문서를 새로 준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발표자가 문서를 어떻게 써오면 좋겠다는 피드백도 명확하지 않았고 발표자 또한 청자들이 뭘 원하는 지 정확히 모른 채 그저 문서만 깎고 있었던 셈이다.
내용이 문제였을까, 발표가 문제였을까
처음에는 당연히 기획 내용이 부족했다고 생각했다.
회의에서 지적받은 내용을 돌아보면 실제로 보완해야 할 부분도 많았다. 캐릭터의 개성이 약하거나, 기존에 있던 그룹과 차별화되지 않거나,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장르적 재미와 맞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설정을 더 보강했다.
캐릭터의 결핍과 목표를 정리하고, 멤버 사이의 관계를 연결하고,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플롯을 다듬었다. 세계관 안에서 이들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기존 캐릭터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설명했다.
피드백을 거칠수록, 문서의 논리는 점점 촘촘해지고 문서의 양도 방대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획이 구체화될수록 발표는 더 어려워졌다. (이전 발표 피드백에서 요청받았던 피드백이 있다보니) 이번 문서에서 보강한 내용을 모두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서의 양이 길어졌으니 발표가 더 길어지는 건 말할 것도 없이 당연했다.
몇 차례 발표가 더 엎어진 뒤에는 다른 의심도 들었다.
혹시 내가 쓴 기획서 내용보다 발표 방식이 문제인 것은 아닐까?
내가 말을 재미없게 해서, 혹은 슬라이드를 지루하게 만들어서 괜찮은 기획이지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기획안이 엎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기획안을 다시 쓰고 회의가 반복되는 이유는 단순히 내가 겪는 이 상황이 단순히 ‘내용과 발표 중 어느 쪽이 한 문제인가’로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기획과 발표는 둘로 톡 잘라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 애초에 한 몸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여줘야 했던 것은 기획서가 아니라 제안서였다
돌이켜보면 나는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처음에는 회사에서 준비된 ‘템플릿’을 다른 사람들이 썼던 ‘레퍼런스’에 맞게 쓰되, 그것을 좀 더 꼼꼼하고 논리적으로 잘 써서 발표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도, 내 발표 내에 포함된 설정의 논리적인 귀결과 세부적인 완성도를 검토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설정이 왜 이렇게 만들어졌는지, 사건이 어떤 순서로 진행되는지, 각각의 캐릭터가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를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들어온 사람들이 가장 먼저 알고 싶었던 것은 조금 달랐다.
이 캐릭터는 대체 누구인가.
이 캐릭터들은 함께 있을 때 어떤 대화를 나누는가.
어떤 상황에서 가장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주는가.
그리고 이 기획이 실제 게임에 들어갔을 때, 유저는 무엇을 보고 좋아하게 되는가.
사람들은 디테일한 설정을 하나씩 이해하기에 앞서, 발표를 보는 동안 자신의 머릿속에 캐릭터와 상황이 자연스럽게 그려지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내가 그 자리에서 해야 했던 일은 완성된 기획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해설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획서 안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뽑아, 발표를 듣는 사람이 쉽게 이해하거나 그들 나름대로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즉, 그 자리에 필요했던 문서는 기획서라기보다 제안서에 가까웠다.
물론 기획서와 제안서를 사전적인 의미로 완전히 분리하기는 어렵다. 회사마다 두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도 다르고, 실제 실무에서는 하나의 문서가 두 역할을 함께 수행하는 경우도 많다.
여기서 말하는 기획서와 제안서는 문서의 공식 명칭이나 파일 형식을 구분하려는 말이 아니다. 같은 문서라도 방향을 합의하는 단계에서는 제안서처럼, 제작 기준을 확정하는 단계에서는 기획서처럼 기능할 수 있다.
이번 경험을 통해 나는 두 문서가 가장 먼저 얻어야 하는 결과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느꼈다.
| 구분 | 제안서·피칭 | 기획서 |
|---|---|---|
| 가장 먼저 얻어야 하는 것 | 흥미, 기대, 방향에 대한 합의 | 이해, 정합성, 실행 기준 |
| 상대의 상태 | 아직 이 기획을 좋아해야 할 이유를 모른다 | 방향에는 동의했고, 구현 기준이 필요하다 |
| 먼저 답해야 할 질문 | 왜 이것을 보고 싶어야 하는가? | 이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가? |
| 앞에 놓여야 할 내용 | 코어, 대표 장면, 이미지, 대사 | 규칙, 구조, 인과관계, 예외 |
| 실패했을 때의 모습 | 이해는 되지만 상상이 되지 않는다 | 매력은 있지만 실행할 수 없다 |
제안서가 상대에게 ‘이 방향으로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만드는 문서라면, 기획서는 합의된 방향을 여러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만드는 문서다.
나는 아직 방향성에 대한 흥미와 합의를 얻어야 하는 발표 자리에서, 이미 합의가 끝난 뒤에나 필요할 법한 디테일부터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그려졌는가
이 경험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박신영의 《기획의 정석》과 박신영·최미라의 《제안서의 정석》을 다시 떠올렸다. 두 책은 내가 회의에서 반복했던 문제를 더 정확한 언어로 설명해주었다.
《기획의 정석》은 기획자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보다,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의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그려졌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제안서의 정석》에서도 잘 읽히는 제안서를 만들려면 “상대방이 궁금한 내용을 궁금해하는 순서로” 써야 한다고 설명한다. 듣는 사람이 관련 상황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따라 전개 방식은 달라지지만, 먼저 그들이 알고 싶은 결론인 What을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내가 했던 실수는 단순했다.
상대방의 머릿속에 What이 그려지기도 전에 너무 많은 How를 설명했다.
내가 보여준 것은 캐릭터의 역할과 결핍, 멤버 간의 상호 보완 관계, 사건의 기승전결, 세계관 안에서의 기능이었다. 각각은 기획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다.
하지만 발표를 듣는 사람들은 그보다 먼저 “그래서 이 캐릭터들이 같이 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를 궁금해했다.
회의에서 반복해서 나온 피드백도 비슷했다.
논리적인 설명을 늘리기보다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강한 상황을 먼저 보여달라는 것. 캐릭터별 대표 행동과 대사를 보여달라는 것. 설정을 나열하기보다 멤버들의 티키타카와 즉각적인 재미가 발생하는 장면을 앞에 배치해달라는 것이었다.
같은 기획이라도 설정의 인과관계를 차례대로 설명하면 듣는 사람에게는 순탄하고 무난하게 느껴질 수 있다. 반면 그 설정이 가장 잘 작동하는 장면 하나를 먼저 보여주면, 사람들은 그 뒤의 설명을 듣기 전에 이미 캐릭터의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좋은 피칭은 모든 것을 자세하게 설명해서 상대를 이해시키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상대가 스스로 상상하기 시작할 수 있을 만큼의 명확한 이미지를 건네는 일에 더 가깝다.
그러한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현장에서 나는 수많은 기획서와 씨름하고 숨막히는 발표를 거쳐야 했으며 몇 번의 재시도를 위해 추가적인 업무 시간까지 투입하는 등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말았지만 말이다.
디테일도, 로그라인도 아닌 ‘장면’을 그리자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또 하나의 질문이 생겼다.
디테일한 기획이 발표에 적절하지 않다면 반대로, ‘로그라인’ 한 줄로 재미를 어필할 수 있을까?
잘 쓴 로그라인은 읽기만 해도 뒷내용이 궁금해지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글을 종종 보게 된다.
나 또한 로그라인의 힘은 인정하며, 기획서를 쓸 때 로그라인을 잘 쓰기 위해 매번 고심을 거듭한다.
하지만 이번 경험을 거치며 ‘잘 쓴 로그라인’만이 옳다는 생각은 조금 내려놓게 되었다.
보통 ‘기획의 코어’라고 하면 기획을 한두 문장으로 압축한 로그라인이나 핵심 키워드를 떠올리기 쉽다. 반대로 구체적인 장면과 대사는 ‘디테일하게 기획한 것의 산물’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경험을 거치며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느꼈다.
‘장면’. 예를 들어, 하나의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다루는 인물과 배경이 모여 대화하는 장면은, 어쩌면 로그라인이나 디테일한 기획보다도 코어를 눈에 잘 드러나게 만들어줄 수 있다.
가령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괴짜 집단’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로그라인을 적는다면, ‘사건이 터지면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허둥지둥하지만 결국 막내가 해결하는 이야기’라고 적을 수 있겠다.
물론 대략적인 방향성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제각기 다른 방식’이라는 압축된 표현은 그들이 각자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대하는 지 잘 상상하기 어렵다.
반면, 위 로그라인을 조금만 더 길게 늘여서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게 써본다고 가정해 보자.
눈앞의 장비에서 갑자기 ‘피쉭!’ 하며 연기가 피어오르고 스파크가 튀었다. 그러자 한 명은 서랍을 열어 매뉴얼부터 찾기 시작하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이 문제 없이 고칠 수 있게 해달라고 십자가나 염주를 꺼내어 기도부터 시작한다. 다른 한 명이 위험하니 팀원들이 금지한 도구를 주섬주섬 꺼내는 동안, 막내만이 묵묵히 ‘하… 저런 꼴을 보느니 내가 하지’ 라며 도구를 꺼내 문제를 직접 고치고 남들이 준비를 마쳐 오기도 전에 해결하고 만다.
이 장면은 앞선 로그라인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등장인물의 행동과 대사, 관계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겉으로는 디테일한 기획처럼 보인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누가 원칙주의자인지, 누가 사고를 치는 사람인지, 누가 결국 상황을 수습하는 사람인지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이 함께 있을 때 어떤 종류의 코미디가 반복될지도 자연스럽게 예상된다.
그렇기에 이러한 ‘대표 장면’은 기획서에 들어가는 ‘부록’이나 ‘보충 설명’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문서 최앞단에 배치해야 할 기획의 코어로 보아야 한다.
물론 하나의 캐릭터를 두고도 여러 가지 다른 대표 장면이 나올 수 있다. 함께 한 대상이 동료인지, 적인지, 아니면 플레이어인지에 따라서 같은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말투나 행동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케이스를 다 준비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나는 만약 여유만 된다면 대표 장면은 적어도 ‘세 개’는 필요하다고 본다. 같은 문제 앞에서 캐릭터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함께 있을 때 어떤 관계적 마찰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캐릭터가 가진 개성요소가 다른 상황에서도 반복될 수 있을지를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캐릭터의 대표 특징이 바로 ‘남들 앞에 꼭 나서야 하는 성격이다’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이 캐릭터가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더라도 먼저 말을 꺼내거나 행동이 앞서는 걸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이 캐릭터가 ‘남들 앞에서는 수줍어하지만, 플레이어 앞에서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도’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면, 보는 사람들은 이 캐릭터가 ‘플레이어’ 앞에서는 또 어떤 모습일지 바로 상상이 되지 않아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캐릭터가 가진 모습을 독자(또는 청자) 입장에서 궁금해 할 만한 변수를 조정하고, 그에 따라서 대표 장면을 구성한다면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만약 ‘발표’라면, 이러한 대표 장면 피칭을 세 번 연달아 보여주는 건 좋은 발표 방식은 아닐 듯하다. 발표에서는 하나의 대표 장면만 피칭하되, 기획서로 디벨롭하는 경우라면 대표 장면을 더 추가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우연히 재미있는 장면 하나가 나온 것과, 캐릭터의 코어가 계속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르다.
캐릭터의 과거와 성격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설명했더라도, 평범한 일상에서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면 설정은 많지만 아직 캐릭터 기획자조차 그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일 수 있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코어는 ‘짧게 적은 설정’이나 소개 문장이 아니다.
캐릭터가 낯선 상황에 놓였을 때도 일관된 선택을 하는지, 여러 인물 간의 관계 안에서 반복 가능한 갈등과 재미를 발생시키는지 기준이나 원리를 잡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코어가 강한 기획은 설정을 전부 외우지 않아도 장면이 나온다. 반대로 코어가 약한 기획은 설정을 많이 알아야만 겨우 캐릭터를 설명할 수 있다.
그 캐릭터를 가지고 어떠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거나 말투나 행동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면 디테일을 더 채우는 것보다 코어는 잘 잡혔는지부터 다시 살펴봐야 한다.
기획 기간이 길다는 것의 의미
나는 일정(기획서 작성을 위해 주어진 기간)이 넉넉하면 그만큼 완성도 높은 문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어진 기간 동안 기획서의 분량을 채우고, 비어 있는 항목을 보완하고, 예상되는 질문에 답할 수 있도록 설정을 추가했다.
물론 이것도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일정에 맞춰 정해진 분량을 모두 작성했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캐릭터와 그룹을 내가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기획 기간을 조금 다르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템플릿에 맞춰 기계적으로 내용을 채우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짧은 대사를 쓰거나 멤버들을 여러 상황에 던져보며 몇 가지 장면을 더 시험해보는 쪽이 오히려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대사와 상황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면 코어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아무리 설정을 들여다봐도 캐릭터다운 말과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면, 아직 기획자인 나부터가 그 캐릭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캐릭터를 움직이게 할 핵심적인 욕망과 관계가 약한 것일 수 있다.
그렇다. 기획을 하고 남은 시간은 설정의 양을 늘리는 게 아니라, 설정의 질을 검증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코어가 잘 작동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 코어를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줄지도 고민해야 한다.
기획 기간이 길다는 것은 페이지를 더 많이 채울 시간이 있다는 뜻만은 아니다.
내가 만든 기획을 여러 장면으로 시험하고, 그중 가장 잘 작동하는 모습을 찾아낼 시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제 아무리 공을 많이 들여 자부하는 기획서라고 할지라도, 플레이어는 기획서가 아닌 ‘게임’이라는 결과물을 통해 캐릭터를 받아들인다.
게임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줘서 캐릭터의 매력을 보여주는 게 좋을까?
거기에서 실패한다면 제 아무리 기획서를 열심히 쓰더라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기획서와 제안서의 차이는 우열이 아니라 순서다
지금까지 ‘양보다 질’, ‘디테일보다는 코어’를 강조하는 말을 했다. 하지만 디테일한 기획서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 제작이 시작되면 세부 설정과 논리적인 기준은 반드시 필요하다. 필자가 앞서 ‘디테일한 기획서’를 고집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캐릭터의 행동 원칙이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되거나, 사건의 인과관계가 앞뒤 문서마다 달라진다면 프로젝트는 금세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제안서만 있다면 매력적인 아이디어를 안정적으로 구현하기 어렵고, 기획서만 있다면 사람들이 애초에 왜 그 아이디어를 좋아해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둘의 차이는 우열보다 순서에 가깝다.
먼저 제안을 통해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그림을 만들고, 그 방향에 대한 기대와 합의를 얻어야 한다. 그다음 기획서를 통해 앞서 제안서를 통해 사람들의 머리에 그려놓은 밑그림이 실제 제작 과정에서 흐려지지 않도록 규칙과 디테일을 세워나가는 식이다.
제안서에서는 코어를 팔고, 기획서에서는 그 코어가 무너지지 않도록 디테일을 설계한다.
나는 제안서를 보여주어야하는 자리에서 기획서를 보여주는 등, 순서를 반대로 밟고 있었다. 아직 사람들이 캐릭터를 상상하지 못하는 단계에서 그 캐릭터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부터 설명했고, 아직 그룹의 매력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세계관 안에서의 기능부터 납득시키려 했다.
내 기획이 반려되었던 건, 내 기획이 틀리거나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아직 밑그림이 그려지기도 전에 채색을 하려고 한 게 실책이었을 뿐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이번 경험을 통해 제안서와 기획서는 분명히 구분해서 준비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처음에는 괜찮은 기획임에도 발표가 망치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발표에서 코어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 역시 기획에 관한 중요한 신호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캐릭터를 정말로 이해하고 있었다면, 설정을 설명하는 대신 그 캐릭터다운 대사와 장면을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내가 그룹의 매력을 정말로 알고 있었다면, 여러 페이지의 설명보다 이들이 함께 있을 때 벌어지는 대표적인 상황 하나를 먼저 꺼낼 수 있어야 했다.
나는 코어를 설명하기 위해 디테일을 쌓았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코어에 관한 더 자세한 설명이 아니라, 코어가 실제로 작동하는 한 장면이었다.
앞으로도 나는 디테일하고 논리적인 기획서를 쓰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기획을 다루는 방식이고, 실제 제작 과정에서도 필요한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다음 발표에서는 그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한 장면을 보여주고 싶다.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을 궁금해한다면, 그때부터 비로소 기획서의 디테일도 읽힐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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