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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디자인 1편] 게임에서 퀘스트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퀘스트 디자인 1편] 게임에서 퀘스트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표지

들어가는 글: 왜 사람들은 ‘퀘스트’에 빠질까

퀘스트 디자인 은 플레이어가 게임 진행을 위해 수행해야 하는 매력적이고 의미 있는 임무나 과제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잘 설계된 퀘스트는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고, 복잡한 서사를 간단하게 풀어내며, 하나의 장면을 감동적인 순간으로 탈바꿈시킨다.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퀘스트가 없는 게임을 해본 경우는 거의 없을 정도로, 대부분의 게임은 ‘퀘스트’를 핵심 구성 요소로 갖추고 있다.

일부 게임 개발자는 퀘스트를 게임의 가장 ‘핵심 요소’중 하나로 꼽아야 한다며 퀘스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퀘스트는 왜 게임 디자이너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질까?

플레이어는 왜 게임을 플레이하며 굳이 퀘스트를 클리어하려고 할까?

이번 글에서는 ‘퀘스트’가 게임 디자이너에게, 그리고 플레이어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관해서 다룬다.


보는 것과 하는 것 사이: 퀘스트가 만드는 능동적 유희

OTT 시대: 적극적 수용자에서 수동적 수용자로

최근 게임 산업 전반에 ‘게임을 하는 사람이 줄고 있다’는 공포 심리가 확산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2025 게임이용자 실태조사>
한국콘텐츠진흥원 <2025 게임이용자 실태조사>

팬데믹 시기 최고점을 기록했던 국내 게임 이용률은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해, 2025년에는 50.2%까지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한콘진, 2025). 이는 2022년(74.4%) 대비 약 24%p 감소한 수치이다.

넷플릭스, 유튜브 등을 비롯한 OTT가 게임의 강력한 여가 경쟁 상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OTT 콘텐츠가 더 다양하고 접근성이 좋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게임 플레이 자체에 피로함을 느낀 플레이어조차 자신이 직접 게임을 플레이하는 대신 버튜버나 기타 유튜버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영상을 보며 대리만족을 하고 있다.

물론 게임 산업 자체에서도 플레이어의 피로를 줄이기  위해 직접적인 개입을 줄이는 방치형, 분재형 게임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그러나 게임 플레이의 본질적 매력, 즉 플레이어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오는 성취감과 능동적 즐거움은, 수동적으로 ‘딸깍’ 한 번이면 도파민을 얻는 콘텐츠에서는 느끼기 어렵다.

퀘스트는 인간에게 즐거움을 준다

Homo Ludens
Homo Ludens: A Study of the Play-Element in Culture
Johan Huizinga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의 본질을 단지 합리적 사유로만 보는 대신, 문화와 놀이 속에서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하는 인간)’이라는 인간관을 제창했다.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유희 추구 활동’이다.

유희 추구란, 말 그대로 ‘노는 것, 재미, 즐거움’을 목적으로 하는 태도나 현상을 가리키지만, 단순한 오락을 넘어 규칙과 상징을 통해 이루어지는 창조적·놀이적 활동을 추구하는 경향을 포함한다.

플레이어는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것 이상으로, 분명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그것을 완료했다는 감각에서 큰 재미를 느낀다.

퀘스트는 ‘목표 제시 – 시도 – 달성(피드백) – 완료’ 피드백 루프를 통해, 게임 플레이를 통한 유희적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핵심 요소이다.

퀘스트는 보상을 얻거나, 서사를 알아가거나, 분명한 목표를 따라 방향을 잃지 않게 하는 등, 플레이 전반의 구조적 즐거움을 만들어낸다.

이는 플레이어가 게임 콘텐츠의 자극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재미를 쟁취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돕는 핵심 역할을 한다.


퀘스트에서 재미를 느끼는 이유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본능

인간은 오래전부터 ‘문제를 풀면 이득이 생긴다’는 패턴에 적응해 왔다.

먹이를 찾고, 위협을 피하고, 집단 안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과제를 해결하는 행위 자체가 생존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은 문제를 인식하는 순간, 그것을 해결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퀘스트는 플레이어에게 이 본능적 욕구를 자극하는 안전한 자극제다.

실패해도 목숨을 잃지 않고, 반복해서 플레이할 수 있으며, 웬만한 경우에는 반드시 해결 가능한 난이도로 설계된다. 플레이어는 퀘스트를 받는 순간부터 ‘해결해야겠다’는 감각을 느낀다.

이것은 게임이라서 느끼는 게 아니라, 수만 년에 걸쳐 진화한 인간이라는 종에 내재된 근원적 동기에 근거한다.

완료 체크와 정리 욕구

주로 RPG나 오픈월드 게임의 플레이어는 퀘스트 목록의 마지막 항목을 완료하거나, 지도 위의 마커를 모두 사라지게 만드는 데에 강한 만족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는 단순히 게임이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미완료 상태’를 해결함으로써 심리적 불편함을 해소하기 때문이다.

The Zeigarnik Effect and the Power of the Incomplete
우리의 심리는 지금껏 완성하거나 완료된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아직 해치우지 못하거나 남겨진 것에 집착한다고 한다.
The Zeigarnik Effect and the Power of the Incomplete

인간은 완료된 과제보다 미완료된 과제를 더 오래, 더 강하게 기억하고 신경 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라고 설명한다.

퀘스트는 플레이어가 이 자이가르닉 효과 때문에 마지막 퀘스트 하나까지 계속 클리어하게 만드는 강력한 동기를 유지시킬 수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과제’를 플레이어의 퀘스트 목록이나 맵 위에 끊임없이 보여준다. 그것이 하나하나 없어져가는 것을 보며 플레이어는 재미(심리적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미니맵에 떠 있는 표식, 퀘스트 로그의 ‘미완료’ 표식, 지역 달성률 퍼센트 등 모든 UI 요소는 플레이어의 ‘마지막 하나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존재한다.

서사적 궁금증

잘 만든 퀘스트는 단순한 심부름에 그치지 않는다. 서사가 결여되어 있는 퀘스트는 오직 ‘목표’와 ‘수량’, ‘보상’만이 제시된다.

예를 들어, ‘슬라임 10마리를 처치하면 한손검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퀘스트는 점차 플레이어의 비판과 무관심 속에 잊혀지고 있으며, 퀘스트 디자이너는 좀 더 ‘서사적 궁금증’을 자아내는 퀘스트를 만들어내야 하는 도전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Environmental Storytelling
잘 설계된 내러티브는 대사 한 줄 없어도 배경 디자인 하나에서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이미지는 ‘포탈 시리즈’의 한 장면.
Environmental Storytelling

잘 설계된 퀘스트는 환경 스토리텔링(environmental storytelling)을 적극 활용하게 된 경우가 많다.

폐허 도시 레벨 디자인, 또는 NPC의 외양이나 의뭉스러운 태도나 말투 등을 통해, 플레이어는 ‘폐허 도시에서 무언가 숨겨진 과거가 있었겠구나’라는 흥미진진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플레이어는 자연스럽게 그 ‘의문’을 해소하고 싶기 때문에 다음 퀘스트를 향해 손을 뻗는다.

롤랑 바르트는 이를 그의 저서 S/Z에서 ‘해석학 코드(Hermeneutic Code)’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이야기 안에서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 수수께끼나 의문은, 플레이어나 독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자아내 계속 뒷장을 읽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작가나 퀘스트 디자이너는 정답을 즉시 알려주지 않음으로써 뒷이야기를 읽게 만든다. 게임에서 퀘스트는 이 역할을 수행한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라는 궁금증이 해소되기 전까지 플레이어는 게임을 끄기 어렵다. 퀘스트의 서사적 장치가 곧 플레이어를 게임에 붙잡아두는 힘이 된다.

성장·자기효능감

퀘스트를 완료할 때마다 캐릭터는 경험치를 얻고, 새로운 스킬을 배우며, 더 강한 장비를 갖추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캐릭터가 성장하는 것을 플레이어는 마치 자기 자신이 성장하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내가 이 던전을 클리어했다.”, “내가 이 보스를 잡았다.” 처럼,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행위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이러한 감각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게임이 의도적으로 플레이어를 게임 속 세계에 몰입시킨 결과이다.하나의 과제를 마친 플레이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어렵고 까다로운 도전을 향해 손을 뻗는다.

게임의 난이도가 올라갈수록 바로 좌절하기보다 도전 의지가 앞서는 것은,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성공 근육’을 길러두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는 이를 자기효능감(Self-Efficacy)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누적될수록 인간은 더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려 한다는 것이다.

퀘스트는 이 자기효능감을 단계적으로 쌓아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쉬운 퀘스트에서 시작해 점차 난이도가 올라가는 설계는 플레이어가 스스로 ‘나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퀘스트에서 보상이 없어도 재미가 있는가?

퀘스트에서 재미를 느끼는 순간

퀘스트에서 재미를 느끼는 시점이 정확히 언제일까?

많은 사람이 ‘보상을 받는 순간’이라고 기대하지만,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보상을 받는 순간보다는 보상을 기대하는 순간에 더 강하게 도파민을 분비한다고 한다.

즉, 퀘스트를 받고 ‘이걸 완료하면 희귀 아이템이 나온다’고 기대하는 순간, 재미를 느낀다는 것이다.

퀘스트를 하는 이유나 그 존재 이유가 단순히 ‘보상을 얻기 위해서’가 아닌 셈이다.

수치 보상만이 전부가 아니다

최근 일부 게임에서는 게임 내 ‘가이드’ 페이지를 열어보기만 해도 소정의 보상을 제공한다.

CCG(캐릭터 콜렉팅 게임)의 경우 원하는 캐릭터를 얻으려면 일정량의 ‘크리스탈(수정)’을 얻어야하는데, 이러한 재화는 보통 유료로 결제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희소하다.

그런데 게임 플레이도 아니고, 게임 가이드를 읽기만 해도 이러한 크리스탈을 제공하는 것을 보고 게임 디자이너로서 이러한 의문이 들었다.

“게임을 플레이하며 경험하는 모든 구간에 다 보상을 넣어야 하는 걸까?”

현업에서 게임을 개발하다보면 ‘보상이 없어도 플레이어가 이 콘텐츠를 즐겨 줄까?’라는 고민에 맞닥뜨릴 때가 많다.

플레이어의 ‘시간’은 희소자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가 30분을 투자해서 데일리 숙제를 할 수도 있지만, 새로 준비한 미니게임 콘텐츠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미니게임 콘텐츠에 아무런 보상이 없어도 플레이어가 플레이를 하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일부 사례에서는 눈에 띄는 보상이 없어도, “더 높은 난이도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플레이어가 강한 동기를 느낀다고 한다.

오히려 보상이 없기 때문에 더 마음 편하게 도전 과제에 도전한다는 사례도 있다.

이처럼 플레이어는 ‘수치적 보상’ 때문만이 아니라 게임 플레이와 도전 그 자체에서 느끼는 ‘재미’ 때문에도 퀘스트를 수행하기도 한다.

자기 만족형 업적의 존재 의의

https://screenrant.com/cyberpunk-2077-witcher-3-ciri-secret-easter-egg-location/
사이버펑크 2077에 등장하는 ‘위쳐 시리즈’ 이스터 에그. 기업 루트로 시작하면 처음의 사무실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부 퀘스트나 업적은 순수하게 플레이어의 자기만족을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이스터 에그’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플레이어가 이스터 에그의 존재를 모르더라도 게임을 이해하거나 재미를 느끼는 데 전혀 지장이 없지만, 플레이어는 그러한 숨겨진 요소를 알아낸 것만으로도 다른 콘텐츠에서 느끼지 못했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자기만족형 업적’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를 게임으로 구현한 결과물이다.

에드워드 데시와 리처드 라이언의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 따르면, 외부에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행위 자체에서 만족을 얻는 경험이 오히려 더 강한 몰입과 지속하려는 의지를 만든다고 한다.

즉, ‘보상 없는 퀘스트’가 플레이어를 더 순수하게 게임에 묶어둔다는 것이다.

게임 디자이너 입장에서 보면, 자기만족형 업적은 플레이어에게 “이 세계에는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는 밀도감을 부여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수치 보상 없이도 플레이어를 세계 안에 더 오래 머물게 만드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퀘스트 설계인 셈이다.


퀘스트가 게임 속에서 수행하는 기능들

“지금 뭘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가이드

블루 아카이브 첫출근 가이드 미션
많은 게임이 퀘스트를 ‘튜토리얼’의 기능을 병행하게 하여 사용하고 있다.

오픈월드나 대규모 RPG에서 플레이어가 가장 먼저 느끼는 감각 중 하나는 막막함이다.

지도는 넓고, 선택지는 많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다. 퀘스트는 이 막막함을 해소하는 가장 직접적인 장치다. “지금 이것을 하라”는 명확한 지시와 함께, 플레이어가 세계와 상호작용을 시작할 수 있는 진입 지점을 만들어준다.

이러한 퀘스트의 역할은 단순한 편의 기능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인지심리학에서 말하는 ‘결정 피로(Decision Fatigue)’ — 선택지가 너무 많을수록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경향 — 를 게임 설계 차원에서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퀘스트가 없는 샌드박스 게임에서 많은 플레이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이탈하는 현상이 이를 방증한다.

콘텐츠를 플레이하게 만드는 내비게이터

게임 내 아무리 정교하게 설계된 전투 시스템이 있어도, 플레이어가 그것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다.

퀘스트는 게임 디자이너가 준비한 시스템과 콘텐츠를 플레이어가 인지하고 이용할 수 있게 돕는 ‘내비게이터’ 역할을 한다.

게임 디자이너 관점에서 보자면, 퀘스트는 콘텐츠를 플레이하도록 유도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공들여 만든 지역이나 시스템이 플레이어에게 발견되지 않는 것은 개발 리소스의 낭비다.

퀘스트는 플레이어가 그 콘텐츠가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만드는 효과적인 도구인 셈이다.

새로운 지역과 시스템을 알게 만드는 튜토리얼

33 원정대 월드맵
게임을 플레이하며 내가 무엇을 해야할 지 모를 때 ‘지도’와 ‘퀘스트’는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안내한다.
특히 ‘퀘스트 마커’는 내가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강력한 포인트이다.

게임에는 플레이어가 스스로 찾아가지 않으면 영영 경험할 수 없는 콘텐츠가 존재하기도 한다.

잘 설계된 퀘스트는 그러한 콘텐츠를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며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돕는다.

예를 들어, ‘숨겨진 마을’을 찾아낼 수 있게 하거나, 그 마을에서 살아가는 NPC들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하거나, NPC의 기능이나 역할을 알게 하거나, 그들 사이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게 돕는다.

대표적으로 ‘심부름 퀘스트’는 이러한 마을의 구조와 NPC 배치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만드는 데 활용된다.

퀘스트에서 이 기능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플레이어가 자신이 유도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세계를 알아가며 새로운 경험을 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저기에 가면 보상이 있어요’가 아니라, ‘현지 사람들을 알아가면 뭔가 새로운 걸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접근 방식은, 자연스럽게 플레이어를 세계에 섞여들어가게 한다.

이것이 퀘스트가 단순히 ‘튜토리얼 팝업 메시지’보다 효과적인 이유이다.

서사를 전달하는 매개체

퀘스트는 세계관을 전달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단이다.

마치 백과사전식으로 ‘누구는 몇년에 어디에서 태어나서 어떤 직업을 가졌다’같은 서술이 아니라, 직접 그 인물을 만나게 하고 그에게서 자신의 신분과 직업을 직접 들으면서 세계관을 알아갈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방식은, 플레이어가 그를 둘러싼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스토리를 경험할 때 훨씬 강하게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이는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Show, don’t tell)’라는 내러티브 디자인의 핵심 원칙에 부합한다. 말하기(Tell)는 정보나 감정을 직접 서술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마을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한 악인이야’라는 대사 등이다.

그러나 보여주기(Show)는 같은 정보나 감정을 인물의 행위나 배경 연출로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반면 같은 정보를 Show 방식으로 전달하면, ‘사냥꾼 해릭이 등장하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시선을 피하고 뒤로 물러선다’는 연출 하나로 충분하다.

감정적 유대를 형성하는 장치

위쳐 3 퀘스트 완료 스크립트
주인공이 되어 선행을 베풀거나, 사기를 치거나 하는 것은 내 자유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통해 어떤 보상을 받을지 기대하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 된다.

퀘스트가 수행하는 기능 중 가장 간과되기 쉬운 점은, 퀘스트가 ‘감정적인 유대 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NPC의 의뢰를 받아 그의 딸을 찾아주고, 재회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 플레이어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이야기의 핵심 참여자가 된다.

이러한 감정적 몰입은 플레이어가 게임 세계를 ‘살아있는 공간’으로 느끼게 한다.

플레이어의 ‘선택지 대사’도 감정적 유대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플레이어가 어떠한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대사가 달라지거나 퀘스트의 방향성이 달라지는 등의 결과를 통해, 퀘스트는 플레이어를 더 깊이 서사에 몰입하게 돕는다.

예를 들어, 페르소나 시리즈에서 플레이어는 히로인을 1명 선택할 수 있는데, 그녀에 대한 공략을 마치고 나면 자연스럽게 다른 히로인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이는 이 게임을 n회차 플레이하게 만드는 간접적인 장치로 활용된다.


퀘스트가 제공하는 구조·목표·보상

구조: 내가 해야 할 행동에 순서를 부여한다

한 번 퀘스트가 없는 RPG가 있다고 상상해 보자.

플레이어는 광활한 세계 안에 서 있지만, “왜 내가 이 행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대부분의 플레이어에게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스트레스다. 퀘스트는 이러한 부담을 자연스럽게 해소시키는 ‘동기 제공자’이다.

“이 마을을 구하기 위해”, “이 인물과 사귀기 위해” 등의 동기가 주어지는 순간, 플레이어의 매 순간의 행동은 단순한 조작에서 의미 있는 선택으로 바뀐다.

퀘스트 구조는 단순히 ‘무엇을 할지’ 알려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어떤 순서로 세계를 경험하면 되는지 설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잘 설계된 퀘스트 구조는 플레이어가 세계 속에 숨겨진 설정과 전모에 단번에 압도되는 대신, 조각조각 발견하며 이 세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돕는다. 퀘스트의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 곧 플레이어의 경험의 순서를 설정하는 일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표: 방향을 제시하고 진행도를 체감하게 한다

목표는 단순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장치가 아니라, ‘나는 지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진행도를 느끼게 만들어주는 동력이기도 하다.

오픈월드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수십 시간을 플레이하고도 이탈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퀘스트가 끊임없이 작은 성공의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메인 퀘스트 하나를 완료하기까지 수십 개의 서브 퀘스트와 사이드 퀘스트 등이 그 사이사이를 채우며 플레이어가 ‘정체된 느낌’을 느끼지 않고 계속 움직이게 만든다.

잘 설계된 퀘스트는 플레이어가 큰 목표(메인 퀘스트)를 중간 목표와 작은 목표로 계층화하여, 플레이어가 언제 어느 시점에서든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이것을 하고 있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는 플레이어가 방향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메인 엔진이다. 이러한 계층적 목표 구조가 무너진다면, 플레이어는 방향을 잃게 되고 흥미가 떨어져 이탈할 수도 있다.

보상: 성장을 체감하게 만든다

퀘스트를 완료했을 때 주어지는 보상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수치적 보상이다. 경험치 증가, 새로운 장비 장착, 재화의 증가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 다른 보상은 바로 서사적 보상이다. 스토리 진행, 새로운 지역 해금, NPC와의 관계 진전이나 변화 등이다.

중요한 건, 두 종류의 보상이 모두 ‘나는 성장하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만든다는 점이다.

전자는 캐릭터의 스테이터스가 올라가는 것으로 느낄 수 있고, 후자는 내가 갈 수 있는 세계가 더 넓어지고 이야기의 층위가 더 깊어지는 것으로 체감이 가능하다.

게임 디자이너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바로 전자에 해당하는 ‘수치적 보상’에만 집중한 나머지, 플레이어가 서사적 보상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며 다소 기울어진 성장을 느끼게 만들기 쉽다는 것이다.

성장에 치우쳐지다보니, 퀘스트의 중요도나 그 비중은 단순히 ‘수치적 보상을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에만 그치기 쉽다.

그러나 진정으로 기억에 남는 퀘스트는 대부분 수치적 보상(보상의 훌륭함)보다는, 서사적 보상이 강렬했던 경우에 해당한다.

전설의 검을 얻는 것보다, 그동안 전설의 검을 얻기 위해 함께 동행했던 동료들이 마지막 모험을 마치고 떠나가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 플레이어의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

이처럼 퀘스트의 보상은 단순히 플레이어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어야 한다는 논리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게임 세계 안에서 자신의 성장과 변화를 체감하게 만드는 ‘서사적 감성’으로 이해될 때 더욱 강력해진다.


퀘스트가 게임을 게임답게 만드는 이유

퀘스트는 이야기를 ‘경험’으로 바꾼다

https://hypebeast.kr/2023/4/ott
2026년 기준 게임의 최대 경쟁자는 경쟁사의 게임이 아니라 OTT다. 사진: https://hypebeast.kr/2023/4/ott

OTT도, 소설도, 영화도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러나 이 매체들은 독자·시청자가 이야기를 단방향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구조이다.

게임은 다르다. 플레이어는 라이터가 준비한 이야기를 단순히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자신이 직접 사건에 개입하고 이야기를 완결짓는 역할을 맡는다.

이것이 게임 퀘스트가 다른 어떤 스토리텔링 매체와도 구분되는 본질적 차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퀘스트는 인간의 문제 해결 본능을 자극하고, 완료 욕구를 불러일으키며, 서사적 궁금증으로 플레이어를 게임 속 세계에 지속적으로 붙잡아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단순한 소극적 수용자가 아니라 적극적 수용자로서 이야기의 주동인물 그 자체가 된다. ‘딸깍’으로 도파민을 얻는 숏폼 콘텐츠가 절대로 제공해줄 수 없는 경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잘 만든 퀘스트가 플레이어의 이탈을 막는다

게임 이용률이 감소하는 시대에, 플레이어의 시간을 두고 경쟁하는 상대는 다른 게임만이 아니다. OTT, 숏폼, SNS 등 모든 디지털 콘텐츠가 플레이어의 30분을 두고 경쟁하고 있다.

이 경쟁에서 게임이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다른 매체가 줄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퀘스트는 다른 매체보다 더 큰 집중과 시간을 요구한다. 숏폼처럼 딸깍 한 번에 자극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퀘스트가 만드는 경험은 다른 어떤 매체도 대체할 수 없다.

한번 그 물결에 올라타면 쉽게 내려오기 어려운 것은, 그 몰입이 수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 스스로 쟁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게임과 다른 매체 각각에서 모두 즐거움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자원은 항상 제한되어 있다. 언젠가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여러 즐길거리 중에서 게임을 택하는 이유는 오직 ‘게임만이 제공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무리: 다음 편 예고

다음 글에서는 퀘스트의 종류와 각 유형이 플레이어에게 어떤 다른 경험을 제공하는지, 그리고 실제 게임 사례를 통해 ‘좋은 퀘스트’와 ‘나쁜 퀘스트’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다.

“[퀘스트 디자인 1편] 게임에서 퀘스트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2개 응답

  1. CherryCokeHolic 아바타
    CherryCokeHolic

    퀘스트 디자인을 기능적으로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좋은 퀘스트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는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이번에도 덕분에 인사이트를 얻어 갑니다.

    1. rejin 아바타

      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어지는 연재글도 기대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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