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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에서 시작하는 게임 디자인: ‘나의 취향’이 오리지널리티가 되기까지


나의 취향이 오리지널리티가 되기까지

들어가는 글

게임 디자인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누군가는 세계관에서 출발하고, 누군가는 시스템 구조에서 시작하며, 또 누군가는 시장성과 레퍼런스 분석부터 검토할 것이다. 게임 디자인에 정답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데서나 시작해도 된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막연하다.

그래서 나는 게임 기획의 출발점을 ‘나의 취향과 문제의식’에서 찾고자 했다.

나는 어떤 게임을 좋아하는지, 어떤 순간에 강하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어떤 게임을 만들고 싶은지를 먼저 정리해 보면, 그것이 결국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나만의 오리지널리티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봤다.

‘나’는 어떤 게임을 만들고 싶은지.
‘나’는 어떤 게임을 좋아하는지.
‘나’는 어떤 게임을 만들어 왔는지.

이처럼 ‘나’를 중심으로 게임 디자인을 시작한다면, 그게 바로 다른 게임과는 다른 ‘나의 생각’이 듬뿍 담긴 오리지널리티 게임 디자인이 가능하지 않을까.

오늘 글은 ‘나의 생각’에서부터 출발한, 아예 Zero부터 시작하는 게임 디자인에 관한 글이다.


‘나’를 더 잘 알기 위한 원석

나를 아는 것이 게임 기획의 시작이다

새로운 게임 기획을 시작할 때, 나는 다른 게임을 켜지 않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자료도, 잠재적 경쟁작에 대한 분석글도, 그 어떠한 레퍼런스도 열어보지 않았다. 그 대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들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획을 앞두고 “나는 어떤 게임을 만들고 싶은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부딪힐 때, 해답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

봉준호 감독은 오스카상 수상 소감에서 마틴 스코세이지를 인용하며 화제가 된 명언을 남겼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

고대 그리스의 격언인 “너 자신을 알라”나, 손자병법의 “지피지기(知彼知己)”라는 격언은 게임 기획에서도 유효하다.

게임 기획자가 창작자가 아닌 모방자가 되어 계속 다른 작품과 대중의 취향에 휘둘린다면, 알맹이 없는 결과물을 낳을 뿐이다.

취향의 ‘역설계’

마루야마 무쿠, 스토리텔링 7단계
마루야마 무쿠, 스토리텔링 7단계 – 신인 작가를 위한 실전강의 (링크)

이런 방식이 완전히 새로운 방법론은 아니다.

일본의 작가, ‘마루야마 무쿠(円山夢久)’는 그의 저서인 스토리텔링 7단계에서 창작자가 도저히 백지 앞에서 나아갈 수 없을 때 ‘가장 좋아하는 작품들을 쭉 적어보라’고 조언한다. 그 리스트가 결국 창작의 발상처가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읽거나 본 소설, 만화, 영화, 드라마 중에서 마음에 들었던 작품의 제목을 생각나는 대로 쓰십시오, 스토리가 있는 작품이라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어느 정도 스토리가 있다면 게임을 넣으셔도 괜찮습니다.

이야기 자체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장면만은 잊히지 않는다’, ‘그 캐릭터가 정말 마음에 든다’ 등의 핀 포인트가 있는 작품이 있다면 그 제목도 써주십시오.

앞으로 이 리스트가 여러분의 ‘플롯 발상처’가 되어줄 것입니다.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말고 가급적 많이 써주십시오. 작품은 최저 50개, 최대 100개 정도가 바람직합니다.

위의 조언은 ‘플롯 기획’을 위해 작가가 하는 조언이지만, 나는 ‘게임 디자이너’도 충분히 응용할 법한 조언이라고 생각한다.

위 조언에서 ‘소설, 만화, 영화’ 대신 자신이 플레이한 게임으로 바꾸고, 그 게임에서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 가령 전투 방식이라든지 교감 콘텐츠, 스토리, 아니면 어떠한 시네마틱 연출이나 보스전 연출 등을 ‘핀 포인트’로 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게임 디자인을 할 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쭉 적어봄으로써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게임이 무엇이었고 나아가 만들고 싶은 게임이 무엇인지 ‘나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취향의 역설계인 셈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 – 게임/애니

위의 ‘마루야마 무쿠’는 50에서 100가지를 적으라고 했지만, 위 리스트는 어디까지나 ‘스토리가 있는 작품’에 한정된 것으로, 게임에 관해 적자면 훨씬 적은 숫자라도 충분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동안 플레이했던 게임과 봤던 애니메이션 중 각각 하나씩을 꼽아 아래와 같은 포맷을 만들어 보았다.

붕괴3rd

2016년 출시 / 3D 모바일 액션 RPG

미호요의 시작을 알리는 액션 RPG로, 키아나/메이/브로냐라는 신호등 3인방 캐릭터의 사랑과 우정, 세계와 운명에 대한 대결을 그린 작품

수십 개의 고퀄리티 컷신과 매력적인 OST가 인상적이었으며, 특히 ‘과거의 낙원’ 스토리에서 ‘라이덴 메이’가 키아나 카스라나와 이별한 뒤 다양한 인물과 만나며 자신의 내면을 깨고 자아의 성숙을 이루며 끝내 율자를 극복하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날씨의 아이

2019년 개봉 / 판타지·로맨스 (세카이계 극장판 애니메이션)

우연히 만난 소녀와 품속에 들어온 권총이 한 소년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지만, 그 소년이 어른을 개심시키고 세계를 미쳐버리게 하면서도 한 소녀를 되찾기 위해 운명에 저항하는 세카이계의 명작

좋아하는 소녀를 되찾고 싶다는 어찌 보면 굉장히 순수하고 로맨틱한 마음 하나로 똘똘 뭉친 소년이, 경찰을 따돌리고 어른에게 일갈하고, 끝끝내 세계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점이 개인적으로는 너무 취향이었습니다.


위의 포맷은 ‘작품명 – 출시년도&장르 – 작품 1줄평 – 좋아하는 지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떠한 게임 디자인의 어려운 개념이나 용어 없이 순수하게 ‘~~한 부분이 좋았다’는 점만 적어도 충분하다.

이러한 리스트만 갖춰져도 NotebookLM이나 ChatGPT 등을 통해 나의 취향이나 관심사 등을 빠르게 캐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취향과 관심사를 모으는 ‘나의 인생작 리스트 작업’이 끝났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기획 인사이트’를 발굴할 때다.

나의 생각 정리하기 – 나의 ‘취향’ 발굴

본인이 생각하는 게임 및 애니메이션 Top 10
본인이 생각하는 게임 및 애니메이션 Top 10

필자는 위에서 ‘붕괴 3rd’와 ‘날씨의 아이’를 언급했지만, 사실 리스트에 오른 작품은 그 외에도 다양하게 있었다.

붕괴: 스타레일, 장송의 프리렌, 이스 8, 창세기전3 파트2, 원신, 페르소나 시리즈 등등.

장르도 플랫폼도 제각각이었는데, 쭉 늘어놓고 난 뒤 살펴보니 뭔가 공통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디테일’한 취향의 발굴

처음엔 단순히 이야기가 좋은 작품들을 꼽았다고 생각했는데, 들여다볼수록 공통점이 좀 더 구체적이었다.

작품 하나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좋아한 게 아니라, ‘특정 일부 장면’을 특히 좋아했는데, 그러한 장면은 예를 들면 아래와 같았다.

  • 붕괴 3rd: 키아나와 메이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자 세계가 더욱 붕괴에 가까워지는 순간
  • 이스 8: ‘다나’라는 한 명의 소녀가 섬 전체의 시간과 운명을 쥐고 있음이 밝혀지는 순간
  • 창세기전: 한 사람의 선택이 그 사람의 인생과 역사, 문명, 나아가 세계의 운명을 뒤바꾸는 순간

내가 좋아했던 건 단순히 ‘스토리가 좋았던 작품’이 아니라, 캐릭터의 감정선이 세계의 구조와 맞물리며 증폭되는 서사였다.

세계관이 거대해서 좋아했던 게 아니었다. 캐릭터가 예쁜 게 좋았던 게 아니었다.

특정 인물의 선택과 상처를 통해, 그 세계가 그 인물의 감정과 함께 연동되어 해석되는 순간을 좋아했던 거다.

이러한 발견은 생각보다 내게 의미가 있었다.

‘세계관은 크고 스펙타클해야한다’는 막연한 믿음을, ‘세계관은 캐릭터를 통해 읽혀야 한다’는 철학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한 문장으로 좁혀보기

하지만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려면, 이 취향을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캐릭터와 세계가 연결되는 구조”라는 말만으로는 너무 넓고, 듣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 ~~를 ~~하는 이야기]라는 구조로 좁혀보기로 했다.

예를 들면, ‘용사’가 ‘세계’를 ‘구원’하는 이야기처럼 굉장히 심플한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식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접근하자, 아래와 같은 문장이 문득 떠올랐다.

누군가(캐릭터)를 끝까지 선택하는 마음이 세계를 뒤집는 이야기

이제 비로소 나는 내가 만들고 싶은 게임의 첫 퍼즐조각을 발굴해 낸 셈이었다.

게임 디자인 요소로 발전시키기

나의 취향을 발굴해낸 것으로 이 모든 작업이 끝난다면 그건 그저 ‘나를 알기’로 그쳤을 것이다.

게임 디자이너로서, 나는 한발짝 더 들어가 이러한 ‘취향’을 어떠한 메커닉스로 승화시킬 것인지 그 아이디어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나는 ‘캐릭터 하나를 깊게 좋아하는 루프’를 설계하기로 했다.

화이트 앨범 리메이크 - 한 명의 히로인을 선택한다는 건 다른 히로인을 포기한다는 걸 의미한다

쉽게 말해, ‘미연시 루트’같은 것인데, 하나의 캐릭터를 정하고 계속 호감도를 쌓으면 그녀와 연인 관계가 되고 마침내 엔딩을 맞이하게 되는 그런 개념이다.

내 취향의 게임은 캐릭터를 ‘끝까지’ 선택하는 마음을 고수함으로써 비로소 세계를 뒤집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고전적 미연시 문법과 다소 닮아있었다.

하지만 내가 만들고 싶은 건 미연시가 아니다.

그래서 이러한 요소를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세부적인 요소로 쪼개보기로 했다.

  1. 주인공과 메인 히로인의 관계 – 신호등 캐릭터? 아니면 파트너 캐릭터?
  2. 주인공과 히로인들 사이의 관계를 ‘시험’하는 세계의 규칙 – 전투? 아니면 감정적 갈등?
  3. 관계를 시험하는 규칙의 플레이 시스템 – 턴제 전투? 호감도 누적에 따른 스토리나 씬 개방?
  4. 세계관의 확장 방식 – 캐릭터 → 팩션 → 디비전 → 월드 순으로 확장되는 세계관?

처음에는 스토리 차원에서 시작했던 생각이,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조금씩 시스템 차원의 질문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게임 디자인의 방향성이 보다 또렷해졌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이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게임에 필요한 요소들을 하나씩 수면 아래에서 떠오르게 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칭송받는 자 전투
  • ‘미연시’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닌 이상 RPG가 될테고 전투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핵심 콘텐츠가 된다.
  • 전투만 한다면 캐릭터와의 교감보다는 성능이나 외양에 치중될 가능성이 높다.
  • ‘캐릭터를 끝까지 선택하면~’라는 세계관을 택한 이상, 캐릭터와의 관계와 교감에 집중하는 콘텐츠가 필요하다.

서두에 적었듯, 게임 디자인은 정형화된 공식이 있는 게 아니라서 본인이 편한 방식대로 접근해도 된다.

필자는 ‘내러티브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스토리를 가장 먼저 접근했던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위처럼 다양한 아이디어가 연달아 생겨나면서 조금은 더 방향성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처럼 본인이 익숙하고 좋아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면 게임 디자인을 막연하게 두려워하거나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도 좀 더 쉽고 덜 스트레스를 받으며 기획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생각 정리하기 – 레퍼런스에 대한 ‘비판적 사고’

익숙한 육성 플로우에 대한 고찰

아이디어를 여러가지 내다 보니 이러한 플로우를 떠올리게 되었다.

  • 첫 만남: 캐릭터를 스토리에서 만나거나 가챠를 통해 획득한다.
  • 호감도 상승: 어떠한 콘텐츠(미정)를 통해 캐릭터 호감도를 높인다.
  • 스토리 열람: 특정 호감도에 다다르면 캐릭터의 스토리를 볼 수 있다.
  • 호감도와 캐릭터 성능의 연동: 캐릭터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캐릭터의 스킬이 개방되거나 스탯이 상승한다.
  • 캐릭터 각성: 특정 스토리에서 캐릭터의 ‘고민거리’를 해결하면, 캐릭터를 각성시킬 수 있게 된다.
  • 캐릭터 초월: 캐릭터의 ‘관계’가 Max가 되면 캐릭터를 초월시킬 수 있게 된다.
  • 캐릭터 이격: 특정 시즌 이벤트나 특정 캐릭터가 주역이 되는 메인 스토리를 클리어하면 해당 캐릭터(주연)의 이격 캐릭터를 얻을 수 있게 한다.
  • 그 외 기타 등등…

이렇게 아이디어를 확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숙한 캐릭터 육성 플로우가 떠올랐다. 캐릭터를 획득하고, 호감도를 올리고, 일정 수치에 도달하면 스토리가 열리고, 관계의 진전에 따라 성능이나 추가 콘텐츠가 해금되는 구조다.

블루 아카이브 '모모톡'과 '인연 랭크' 시스템
블루 아카이브 ‘모모톡’과 ‘인연 랭크’ 시스템

이 플로우는 대부분의 캐릭터 수집형 RPG에서 이미 널리 활용되고 있다. 안정적이고 이해하기 쉬우며, 운영형 게임에서도 반복적으로 적용하기 좋은 방식이다. 실제로 많은 게임이 가챠 획득, 대화형 교감 콘텐츠, 인연 스토리 개방, 성능 보상이라는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바로 그 안정성이, 플레이어에게는 익숙함을 넘어 진부함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 구조를 부정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 틀 자체를 한 번 비판적으로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비판적 사고와 문제의식 정립

쿠키런 IP에도 '톡' 시스템이 생겼다
쿠키런 IP에도 ‘톡’ 시스템이 생겼다

게임 디자이너에게 중요한 역량 중 하나는 결국 익숙한 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어떤 경험을 만들고 어떤 한계를 만드는지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검증된 레퍼런스를 참고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 방식만 반복하다 보면 내가 만들고 싶은 게임보다 이미 존재하는 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물에 가까워질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안정적이고 고정된 플로우’는 AI가 가장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요소라는 점이다.

게임 디자이너가 여전히 인간이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비판적 사고’에 있다.

내가 기존의 ‘톡 기반 교감 콘텐츠’를 보며 문제의식을 느낀 이유도 여기에 있다.

  1. 톡을 통해서 호감도를 쌓고 스토리를 보는 건 이제는 식상하다 못해 게임 시스템으로 느껴지는 영역에 다다랐다고 생각한다.
  2. 메인 스토리의 진도와 캐릭터 스토리의 맥락이 안 맞을 수 있다.

이러한 구조적 취약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런 구조를 계속 되풀이하며 만드는 건 기획자로서 지양해야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은 누구와 함께 상의해야 하는 걸까?

내러티브 디자이너는 이때 ChatGPT 등의 ‘AI’를 활용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

AI가 기존의 뻔한 시스템을 가장 쉽게 복제해 낸다면, 역으로 우리는 AI를 ‘내 독창적인 문제의식을 검증하고 발전시키는 토론 파트너’로 활용해야 한다.

AI와의 토론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뾰족하게 다듬을 수록, 오히려 AI가 쉽게 따라오지 못하는 나만의 오리지널리티를 발굴해낼 수 있다.


AI와 핑퐁하기

여전히 AI를 사용하며 기획하는 건 기획자의 자질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AI를 이용한 개발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이 되었다.

이는 개발자나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기획자 또한 마찬가지인데, AI를 적재적소에 사용하기만 한다면 개발 시간을 단축하고 안정적인 기획서를 쓸 수 있는 시대다.

나는 내가 가진 ‘문제의식’을 AI에게 건네며, 나의 문제의식을 AI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이어서 내가 무엇을 신경쓰며 게임 디자인을 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해보았다.

AI에게 질문하기

많은 게임이 ‘톡’을 기반으로 한 교감 콘텐츠 입구 콘텐츠를 만들고 있어.

가챠 등을 통해 새로운 캐릭터를 획득하면, 그 캐릭터에게서 톡이 오고, 그 톡을 따라 들어가면 대화를 하고… 대화가 끝나면 또 다음에 어떠한 이유로 쌓은 호감도 등을 통해서 새로운 인연 스토리가 열리면서 스토리가 계속 열리는 방식이지.

그러다보니 문제가 생기는데, 캐릭터가 어떠한 서사적인 계기가 없다 해도 특정 호감도만 달성하면 톡이 오면서 스토리가 열리는 거야.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그냥 다양한 캐릭터가 있을 뿐 다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캐릭터 스토리를 보게 되다보니 캐릭터와의 교감이 특별한 경험이라기보다는 그냥 ‘게임 시스템’으로 느껴지기 쉽다고 생각해.

실무에서도 문제가 있었어. 가령, 캐릭터 스토리가 열리는 시점이 메인 스토리의 어느 시점 이전이냐 이후냐를 모르겠는거야. 예를 들어, 캐릭터 스토리가 오픈된 시점은 메인 스토리 전인데, 메인 스토리에서는 캐릭터가 아직 츤데레에서 ‘츤’의 비중이 강한 반면에, 캐릭터 스토리는 ‘데레’ 비중이 크다면 감정선이 안 맞잖아. 그 이유는 수집형 RPG 특성상 가챠를 통한 캐릭터 획득 시점과 플레이어의 메인 스토리 진행도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캐릭터 스토리는 ‘메인 스토리’와 연결지어서 푸는 게 좋다고 봤어. 한때 내가 참여했던 어떤 프로젝트에서는 각 메인 스토리마다 다양한 루트가 있고, (회귀하는 세계관이었어) 루트에 따라서 집중 조명되는 캐릭터가 달랐어.

물론 메인 스토리는 기본적으로 무게감이 있는 스토리이다보니 캐릭터의 어떠한 귀엽거나 일상감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어렵지. 이런 캐릭터 스토리는 메인 스토리 이후에 ‘후일담 스토리’ 개념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 같아.

한 마디로, ‘캐릭터 스토리’의 ‘메인 스토리화’가 되는 거지.

AI의 답변

위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캐릭터 스토리를 메인 스토리 바깥의 보너스가 아니라 메인 스토리를 굴리는 동력으로 재배치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당신이 좋아하는 작품들의 공통점인 “개인의 감정과 관계가 세계의 운명과 직접 연결되는 구조”와도 정확히 맞물립니다.

반대로 기존 호감도-개방형 톡 시스템은 접근성은 좋지만, 서사의 필연성이 약합니다. 캐릭터가 어떤 상태에 있든 일정 수치만 넘기면 비슷한 포맷으로 친밀한 대화를 시작하게 되니, 플레이어는 관계를 “쌓았다”기보다 “해금했다”고 인식하기 쉽습니다.

당신의 생각의 특히 좋은 지점은 “누구의 루트를 탔느냐에 따라 메인 스토리의 초점이 달라진다”는 설계입니다. 이렇게 하면 특정 캐릭터는 단지 별도 외전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 루트에서 세계를 해석하는 렌즈가 되고, 플레이어는 그 캐릭터를 좋아해서 따라가는 동시에 세계의 진실도 더 깊게 보게 됩니다.

이 방식은 감정선 관리에도 유리합니다. 메인 스토리의 특정 국면에서 아직 경계심이 큰 캐릭터라면 그 시점의 메인 루트 안에서도 그 온도로 유지할 수 있고, 이후 사건을 거쳐 태도가 변했을 때 후속 에피소드나 후일담을 배치하면 스토리의 맥락이나 시간선이 뒤엉키는 등의 실무적 문제를 훨씬 줄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조를 쓰려면 각 캐릭터는 “세계의 구조적 문제”에 물려 있어야 합니다. 캐릭터의 고민의 크기가 개인적 차원에만 머물면 메인 스토리화하는 순간 비중은 커지는데 긴장감은 오히려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캐릭터는 “성격”보다 먼저 “세계와 맺는 균열점”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캐릭터는 봉인된 기술의 계승자, 어떤 캐릭터는 적대 진영 질서의 예외, 어떤 캐릭터는 루프의 기억 누락자, 어떤 캐릭터는 세계 멸망의 원인과 직접 연결된 존재여야 메인 플롯과 자연스럽게 접속됩니다.

'디버스 오더'에서는 메인 스토리를 클리어하면 특정 '루트'를 분기해서 진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디버스 오더’에서는 메인 스토리를 클리어하면 특정 ‘루트’를 분기해서 진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여기서 핵심은 호감도 수치가 아니라 “공동 경험의 누적”을 저장하는 것입니다. 캐릭터와의 관계는 단순 대화 횟수가 아니라, 어떤 사건을 함께 겪었는지, 누구 편에 섰는지, 무엇을 포기했는지, 어떤 진실을 공유했는지로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스템은 이런 식이 좋습니다.

  • 기본 친밀도는 존재하되, 스토리 개방 키는 아니다.
  • 각 캐릭터에게는 “공유 사건 플래그”가 있다; 예: 함께 생환함, 비밀을 들음, 배신을 목격함, 금기를 공모함.
  • 에피소드 히로인 장에서는 이 플래그 조합에 따라 대사, 연출, 선택지, 합동 스킬, 결말 감정선이 달라진다.
  • 메인 스토리 종료 후 후일담에서는 이전 메인 장에서 쌓은 기억이 일상 대화와 사적인 교감으로 환원된다.

이 구조가 특히 좋은 이유는, 시간축 충돌을 해결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캐릭터 스토리가 오픈되는 조건이 호감도 n 이상이 아니라 “메인 스토리 3장 사건 이후”, “특정 에피소드에서 A 선택지를 선택 했을 경우”처럼 명확한 서사적 계기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AI의 답변을 토대로 생각 정리하기

AI의 답변을 정리하면 핵심은 세 가지였다.

첫째, 내가 제안한 방식의 강점은 캐릭터 스토리를 메인 스토리 바깥의 보너스가 아니라, 메인 서사를 굴리는 동력으로 재배치한다는 점이었다.

둘째, 이런 구조가 작동하려면 각 캐릭터는 단순한 성격적 매력만이 아니라, 세계의 구조적 문제와 연결되는 균열점을 가져야 했다.

셋째, 관계는 호감도 수치보다 공동 경험의 누적으로 기록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AI와의 대화를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아이디어의 완성된 답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더 구체화해야 하는지 선명하게 확인한 것이었다.

캐릭터 스토리의 메인 스토리화로 훌륭한 예시인 ‘나히다 스토리’.

회의나 협업 과정에서는 생각하지 못한 취약점을 즉석에서 지적받는 순간이 자주 생기는데, AI는 그 전에 논리를 한 번 점검해 보는 리허설 상대가 되어 줄 수 있다.

이번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단순히 “톡 시스템이 식상하다”는 문제제기만 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캐릭터와 세계의 관계를 더 긴밀하게 연결하는 구조를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AI와의 대화를 통해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이 과정에서 떠오른 핵심은 ‘캐릭터 스토리의 메인 스토리화’였다. 아직 완성된 설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어디를 향해 더 구체화해야 하는지는 분명해졌다. 그리고 기획의 출발점에서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큰 진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타 게임 레퍼런스’를 고스란히 계승하고 내 게임에 접목시키기보다는, AI와 대화하며 다른 게임과는 조금 다른 새로운 접근법을 고안해볼 수 있게 되었으며, 이것은 내가 만들 게임의 새로운 ‘오리지널리티’ 요소로 떠오를 수 있는 가능성도 생겨나게 되었다.

물론 이 아이디어가 완성된 설계는 아니다.

생각의 방향이 잡힌 것이지, 구체적인 구조가 완성된 건 아니다.

하지만 기획의 방향이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출발점으로는 충분했다.


내러티브 디자이너가 AI를 통해 협업하는 방법에 대해 궁금하다면 위 관련글도 참고해 주세요. (링크)


글을 마치며

나는 게임 디자인을 시작할 때 ‘나의 취향’과 ‘나의 비판적 사고’라는 두 가지 축으로 출발했다.

특히 ‘나의 취향’의 경우, 단순히 내 관심사를 정리하고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라,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임과 만들고 싶은 게임이 무엇인지 다시금 되짚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작업이었다.

게임잡 공고에 올라온 '본인이 생각하는 애니메이션 및 게임 Top 10
게임잡 공고에 올라온 ‘본인이 생각하는 애니메이션 및 게임 Top 10

실제로 게임 회사의 채용 과제 중에는 지원자에게 좋아하는 게임이나 최근 플레이한 작품을 이유와 함께 적게 하는 경우가 있다. 단순한 취향 조사라기보다, 그 사람이 자기 감각을 어떤 언어로 설명하고 구조화할 수 있는지를 보기 위한 질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결국 기획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뚝딱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내 안에 이미 존재하던 감동의 원형을 논리로 재구축하는 과정이다.

당신의 리스트에는 지금 어떤 가능성의 씨앗이 숨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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