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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설정 기획을 잘 한다는 것은
설정 기획을 잘 한다는 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경험이 많지 않은 설정 기획자는 대개 ‘반지의 제왕’처럼 대서사시를 쓸 줄 아는 사람이 진짜로 설정을 잘 짠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 게임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그들의 역량 중 ‘멋진 세계관을 혼자 짜는 능력’은 의외로 비중이 크지 않다.
조금 더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치밀한 개연성과 핍진성, 그리고 흥미로운 세계관을 만들 수 있어야 설정 기획을 잘 한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개연성과 핍진성, 흥미진진한 설정만 갖추면 정말로 충분히 “일 잘한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애초에 설정 기획자가 설정을 잘 짜는 것 외에 어떤 능력이 더 필요할까?
‘설정을 잘 짜는 것’ 말고 어떤 능력이 더 필요할까.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설정 기획자는 설정을 짜는 사람이 아니다
나도 인정한다.
이 말은 이상하다. 설정 기획자가 설정을 짜는 사람이 아니라니.
마치 요리사보고 요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하지만 필자가 그동안 게임 업계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바로는, 설정 기획자는 설정을 짜는 사람, 엄밀히 말해서 혼자서 설정을 제시하고 완성을 시키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임의 큰 얼개는 PD나 디렉터가 짠다.
게임의 구현은 클라이언트 개발자가, 비주얼 방향성은 AD나 리드 아티스트가, 게임의 코어 루프는 밸런스 디자이너가, 게임의 경험 구간 설계는 시스템 디자이너가, 게임의 재미 요소는 레벨 디자이너가 설계한다.
설정 기획자는 그러한 각 직군의 전문가들이 만드는 요소를 조금 더 ‘색칠해주는’ 사람이다.
전문성을 요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어떤 직군보다도 ‘전문성’이 없다면 살아남기 힘든 게 설정 기획자이기도 하다.
혼란스러울 수 있음을 안다. 설정 기획자의 역할은 그저 남들의 뒤를 봐주는 역할에 불과한 걸까? 그렇다면 설정 기획자는 나만의 창조적인 결과물을 만들 수 없는 걸까?
애초에 설정 기획자가 왜 필요한 걸까?
‘내 앞의 사람’을 상상하게 만드는 사람
설정 기획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다.
협업 파트너가 내 설정을 보고 듣고 이해했을 때, 그걸 바탕으로 자신의 창조적 결과물을 만들 수 있도록 ‘영감을 주기 위해서’다.
설정은 문서나 말로만 존재할 때는 게임 안에서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 설정이 아티스트의 컨셉 아트, 레벨 디자이너의 맵 구조, 시스템 디자이너의 설계 같은 구체적인 결과물로 구현되는 순간에야 비로소 설정 기획자의 진가가 드러난다.
이쯤이면 눈치 빠른 독자분은 아마 감이 왔을 거다.
설정 기획자는 그 어떤 직군보다도 ‘커뮤니케이션’, 즉 협업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설정 기획자가 협업 파트너와 커뮤니케이션하지 않으면, 그 게임은 설정 기획자 없이 게임을 만드는 것과 다름 없다.
즉, 게임의 설정은 그냥 문서로써만 존재할 뿐, 아티스트의 결과물에 전혀 반영이 안 되는 거다.
내가 짠 설정은 독자나 시청자에게만 설득력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파트너에게도 치밀하고 개연성 있고 현실감 있게 다가가야 한다.
한 발짝 더 나아가, 나와 협업하는 파트너에게 내가 말하는 세계관과 설정이 납득이 가고, 공감이 가며, 그 설정대로 게임을 만들면 재밌겠다는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설정 기획자는 내 앞의 사람이 내 설정을 보거나 듣고 상상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설정 기획자의 생각법
이 글은 ‘거대한 세계관을 만드는 비법’을 알려주고자 하는 글이 아니다.
설정 기획자라면 어떤 식으로 사고해야 현업에서 “일 잘한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지, 그 관점을 나누고자 한다.
설정 기획자는 세계를 완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유저가 해석할 거리’를 설계하는 사람이다.
좋은 설정 기획자가 되려면 “나만 설정 기획을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나 혼자 보며 큭큭대고 재미있어하는 설정은 있을 수 있지만, 세상에서 나만 재미있는 설정을 만들려고 이 일을 택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설정 기획자는 세계를 독점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해석할 거리’를 설계하는 사람이다”
나도, 내 앞사람도, 옆사람도, 그리고 우리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에게까지도 일을 잘 하는 설정 기획자는 그들 나름의 ‘해석할 여백’을 남겨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영감은 주되, 상대의 창조적 해석을 가로막지 않는’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감각을 길러야 한다.
설정 기획자로 살아남기
이 글에서는 ‘전문성’과 ‘센스’, 그리고 그들의 사명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설정 기획자는 분명 매력적인 직업이다. 하지만 시나리오 라이터와의 구분이 불분명하고, 팀이나 조직 내에서 포지션이 명확하지 않은 등의 이유로 ‘제대로 된 설정 기획자’가 되기는 정말 어렵다.
다른 직군이 설정 기획자에게 요구하는 눈높이는 갈수록 높아지지만 정작 설정 기획자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기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는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설정 기획자는, 이 조직이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부터 정확히 자각해야 한다.
기대가 보이면 방향이 생기고, 방향이 생기면 전문성을 어디에 쌓아야 할지도 분명해진다.
때로는 까다로운 요청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하고, 답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근거와 가설을 들고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가 있다.
그 과정에서 고집은 필요하다. 다만 독선이 아니라 ‘원칙’이어야 한다.
함께 만드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는 설정 기획자는, 쉽게 흔들리지 않되 잘 설득하는 사람이다.
이 까다로운 역할을 기대받는 자리에서, 그래도 좋은 설정 기획자가 되고 싶다면 오늘도 한 발짝만 더 사람들 앞으로 나아가 보자.
이 글은 그 한 발짝을 내딛을 준비가 된 당신을 위해 썼다.
설정 기획자의 전문성: 자료 수집
나는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라는 자기 어필
설정 기획자는 회사에서 가장 많은 직군과 대화하는 사람이다.
캐릭터를 기획한다면 컨셉 원화가나 애니메이터와 얘기를 하게 된다.
배경을 기획한다면 배경 아티스트나 레벨 디자이너와 함께한다.
스킬을 기획한다면 밸런스 디자이너나 FX 아티스트와 논의할 일이 생긴다.
그밖에도, 회사에서 맡게 되는 수많은 ‘컨셉’과 관련한 업무는 적어도 한 번은 설정 기획자를 거쳐 간다.
그 모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을까?
바로 ‘설정 기획자로서의 전문성’이다.
앞서 필자가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설정 기획자는 말빨만 좋으면 일을 잘 할 수 있는 걸까?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다. 설정 기획자가 말을 잘하는건 보조 스킬에 불과하고, 진짜 중요한 건 그가 ‘전문성을 가진 사람인가’하는 부분에 대해 확실하게 자기어필할 수 있어야 한다.
설정 기획자의 전문성을 인정받으려면, 그가 진짜로 설정 기획자로서 의지하고 맡겨도 되는가 불안해하는 유관부서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신뢰는 어떻게 얻을까?
바로 자신이 만드는 게임과 관련해서 그 누구보다도 설정에 전문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받으면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2차원게임의 미소녀가 한가득 나오는 게임을 만드는 프로젝트의 설정 기획자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최소한 그 프로젝트 구성원 중에서 그러한 게임을 가장 많이 해본 사람 중 하나라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플레이를 다양하게 해보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그런 작품들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억지로 하는 건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설정 기획자에게는 진짜 좋아하는 그 작품에 대해 뒷설정까지 다 파고들정도로 좋아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좋아하는 작품을 그냥 보지 말고 뜯어 보라
좋아하는 작품을 그냥 ‘보는 것’과, 설정 기획자로서 ‘뜯어 보는 것’은 다르다.
감상은 끝나면 사라지지만, 해체해서 남긴 관찰은 다음 기획의 재료가 된다. 설정 기획자라면 남들이 본 장면을 한 번 더 되감고, 남들이 넘어간 이유를 한 번 더 붙잡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장송의 프리렌’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봤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멜과 프리렌의 관계, 프리렌과 페른의 관계, 그리고 장송의 프리렌 특유의 잔잔한 서사나 일부 액션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설정 기획자라면, 그러한 인물들간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의도로 각 캐릭터가 그런 대사를 했는지,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해석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그런 눈을 갖는 건 어렵지 않다. 몇 번을 다시 보면서, 그 순간 순간을 남들보다 더 ‘흘깃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장면 하나하나가 그냥 단순히 감상을 할 때보다 훨씬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도 마찬가지다. 기획자에게 역기획서를 과제로 주는 이유는, 겉으로 보이는 기능을 나열하라는 게 아니라 “왜 이렇게 설계했는지”를 추론하고 문서로 재구성해 보라는 뜻에 가깝다.
설정 기획자에게도 역기획은 큰 도움이 된다. 캐릭터의 말과 선택, 인기의 이유를 ‘감’으로 두지 않고, 구조와 의도로 정리하는 순간부터 소재는 업무에 쓸 수 있는 자산이 된다.
뜯어보기(해체)를 하려면 먼저 적절한 ‘소재’를 선정해야 한다. 남들이 다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것부터 접근하는 게 좋다. 만약 자신이 특정 회사에 지원하기 위해서 이러한 작업을 한다면, 그 회사 또는 프로젝트에 가장 유사한 것을 분석해보는 게 도움이 된다.
소재를 선정했다면, 이제 ‘어디를 잘라내어 볼 것인지’ 구체적인 범위를 확정하자.
예를 들어 “이 게임의 스토리를 전부 분석하겠다”가 아니라, “세계관에 유저를 몰입시키는 초반 10분 도입부 스토리텔링을 분석하겠다”라고 핀포인트를 잡는 것이다.
의욕이 앞서 게임의 모든 설정을 통틀어 분석하려 들면, 문서는 방대해지는데 정작 독자가 가져갈 핵심 메시지는 흐릿해진다. 결국 쓰는 사람은 지쳐서 나가떨어지고, 읽는 사람은 요점을 찾지 못해 서로가 불행해지는 ‘죽은 문서’가 되기 십상이다.
분석할 대상(소재)과 범위(구간)가 명확해졌다면, 이제 그 안에서 어떤 인사이트를 건져 올릴 수 있을지 ‘아이디어의 조각’들을 모을 차례다.
아이디어는 한 바구니에 모아라
기억을 믿지 말고 기록을 믿어라.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기록해두지 않으면 휘발되기 십상이다.
번뜩이는 발상이 스쳐 지나갔다면, 그것을 어떻게든 붙잡아 둬야 한다.
사람마다 메모하는 스타일과 방식은 다를 수 있다. 누구는 회사의 수첩에 적는 걸 선호할 수도 있고, 누구는 카카오톡 메모장이나 협업툴에서 자신에게 메모 쓰기 등에다가 기록할 수도 있다.
여러 방식을 함께 혼용해서 쓰는 경우도 있겠으나, 웬만해서는 한 군데에 모여있는 게 낫다. 아이디어가 흩어져 있으면 나중에 그 아이디어를 찾으려고 할 때 시간도 낭비되고 본인의 머리도 혼란스러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디어 수집에 있어 필자가 제안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클라우드 서비스 기반 메모앱’을 활용하는 걸 추천한다.
대표적인 앱으로는 에버노트, 원노트, Upnote, 노션 등이 있다.
각각 앱은 장단점이 있는데, 특히 노션은 단순히 메모 앱으로 쓰기에는 프로그램의 기능이 많고 방대하다.
필자가 가장 선호하는 앱은 Upnote다.
무료 버전으로도 충분한 양의 메모를 저장할 수 있고, 무엇보다 PC와 모바일 간 동기화에 제한이 없어 언제 어디서든 아이디어를 던져 넣기 편하다. (대부분의 메모 앱이 동기화 가능 기기 제한을 두어 수익을 창출한다.)
노션도 충분히 훌륭한 앱이다. 그러나 회사에서 공식 협업툴로 노션을 쓰지 않는 경우, 노션에 메모장을 기록하려면 개인 노션을 활용해야한다는 점은 불편 사항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음으로, 아이디어는 비슷비슷한 것끼리 구조화하는 게 좋다.
캐릭터, 세계관, 전투 시스템, UI 레퍼런스 등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 분류해 보자.
특히 다양한 게임을 플레이하다보면 ‘아, 이 레퍼런스는 캡처해두고 나중에 활용해야지’라고 생각이 번뜩일 때가 있다.
그럴 때 캡처해둔 이미지를 자신이 그룹화한 곳에 모아둔다면 나중에 그 아이디어들끼리 모두 나열해두고 비교할 때 서로 비슷하거나 차이점이 있는 아이디어끼리 한 눈에 볼 수 있어 편리하다.
만약 본인이 아직 그룹화를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모르겠다면, 일단 모아두어라.
일단 한 군데에 수십, 수백 개의 자료가 모이게 한 뒤, 나중에 시간을 내서 그것을 쭉 한번 살펴보자. 그러면 모아둔 자료 사이에 일정한 규칙이나 패턴이 보인다. “어? 내가 유독 스킬 이펙트 자료를 많이 모았네?” 싶으면 그때 ‘스킬’ 그룹을 만들면 된다.
중요한 건 예쁘게 정리하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내 것으로 흡수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 기록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완성본부터 만들지 말고 작은 조각부터 쌓아라
설정 기획자가 또 빠지기 쉬운 함정은 처음부터 ‘거대한 것’을 ‘완성’하려고 하는 점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갖 게임,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 작품은 모두 완성된 세계관과 설정을 갖고 출시한다. 특히 일부 작품을 보면 도저히 몇 명의 사람이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나리오가 방대하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그런 작품들마저도 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했다.
집을 지을 때도 먼저 땅을 고르고 재료를 모아야하는 것처럼, 세계관과 설정을 기획할 때도 설정을 기획하기 위한 단단한 토대를 먼저 마련해야 한다.
처음부터 거대한 것을 만들려고 하지 마라.
작은 아이템 하나, 마을 구석의 NPC 한 명, 주인공의 사소한 버릇 하나에서 시작하자.
예를 들어, 캐릭터 세 명을 기획한다고 치자. 이 셋은 어떤 관계인가? 친구인가, 라이벌인가, 아니면 원수인가?
가족은 있는가? 가족이 없다면 전쟁 고아인가? 그렇다면 이 세계에는 전쟁이 있었나?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세계관의 빈칸을 채워줄 것이다.
처음부터 완성하려고 하지 마라.
설정 기획자가 빠지기 쉬운 두 번째 함정은 바로 ‘처음부터 완성된 문서를 써야한다’는 강박이다. 그런데 설정 문서야말로 그러한 완벽주의에서 가장 거리가 멀어야한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 설정 기획자만 설정을 짜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설정 기획자는 자신의 협업 부서에게 창조성을 발휘할 여백을 미리 준비해둬야 한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아티스트는 설정 기획자가 더욱 꼼꼼히 설정을 준비해주기를 희망할 수 있다. 이건 본인의 협업 파트너 스타일에 맞추면 된다.
요는, 처음부터 완성된 문서를 쓰려고 하면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의견을 주기 힘들다. 특히 설정적으로 큰 변곡점이 생겼을 때 돌아가는 과정이 굉장히 고통스러워진다.
예를 들어, ‘천사의 날개’라는 설정에 50페이지를 할애해서 빼곡하게 설정을 준비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우리 게임에서는 천사 비주얼의 캐릭터를 내지 않도록 결정됐다. 그러면 천사의 날개라는 개념은 쓰일 수 있어도, 천사라는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 쓴 시간과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거다. 그리고 생각보다 이런 일은 현업과 실무에서 굉장히 자주 발생한다.
때로는 설정 기획자는 자신의 문서를 더욱 ‘경량화’할 필요가 있다. 내 문서가 다 준비되기도 전에 협업 부서 사람들에게 슬쩍 다가가서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의견을 묻고, 상대방의 피드백을 듣고 난 뒤 그 분의 의견을 취사선택하여 그때서야 비로소 기획서를 완성하는 것도 필요하다.
설정 기획자는 문서에 갇히면 안 된다.
문서가 조금 부족해도, 끊임없이 대화하며 함께 채워나가는 과정. 오히려 ‘완성되지 않음’을 무기로 소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설정 기획자의 진짜 필살기다.
설정 기획자의 필살기: 텍스트 없이 설득하라
형용사를 버리고, 이미지를 심어라
어쩌면 설정 기획자는 회사에서 가장 ‘시적인’ 사람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단, 여기서 말하는 시적인 표현이란 ‘아름답고 애매모호한’ 문장이 아니다. 읽는 순간 머릿속에 선명한 한 장의 그림이 박히는 구체적인 묘사를 뜻한다.
필자가 업계에서 봐온 수많은 아티스트는 ‘애매모호함’보다는 니글거리더라도 ‘구체적인’ 상을 떠올리는 표현을 좋아했다.
‘예쁘다’, ‘귀엽다’, ‘착하다’, ‘센스있다’, ‘잘난척한다’ 라는 표현은 설정 기획자 입장에서는 문제 없어보이는 표현일 수 있으나, 아티스트 입장에서는 사실상 빈칸이나 다름없는 표현이다.
아티스트가 작업하기 위해 필요한 진짜 정보가 결여되어 있는 채, 그저 텍스트가 많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티스트가 이해할 수 있게 적어야 한다. 특히, 아티스트가 바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인 대상으로 적어야 한다.
‘폭군이 살던 성’이라는 표현 대신, ‘부서진 옥좌, 바닥에는 금화가 흩어져 있고, 피 묻은 왕관이 보인다.’라는 표현이 낫다.
‘음산한 분위기의 묘지’라는 표현 대신, ‘이끼가 낀 묘비와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리는 한밤중의 공동묘지’라는 표현이 낫다.
이는 비단 아티스트에게만 도움이 되는 묘사가 아니다. 개발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적당히 긴 거리로 돌을 던진다’는 표현은 프로그래머나 레벨 디자이너가 머리를 싸매는 표현이다. 이런 표현보다는 차라리 ‘5m 거리의 적 1인에게 Action_throw 애니메이션으로 돌을 던진다’는 표현이 낫다.
물론 이 정도로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는 유니티 엔진에 대한 이해가 높거나, 또는 유관 부서 사람들의 기획서를 이해하고 그들의 표현을 빌려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먼저 갖춰야 한다.
이 정도로 묘사하기 어렵다면, 텍스트 설명보다는 ‘레퍼런스’ 이미지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짓발짓을 동원해서 설명하라.
중요한 건 문장의 품격이 아니라, 상대가 오해 없이 이해했느냐다.
시각, 청각, 촉각을 같이 상상하게 하라.
게임은 멀티미디어다. 설정 기획서도 단순한 텍스트 수준을 넘어 공감각적이어야 한다.
캐릭터나 공간을 설명할 때, 흔히들 시각적 요소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색감, 복장, 표정…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당신의 파트너가 사운드 디자이너라면 어떨까?
자신이 대화하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사용하는 표현이나 방식 또한 달라져야 한다.
설정을 기획할 땐 사운드(청각), 질감(촉각/물리), 애니(동적 요소)까지 함께 생각해 보자.
그냥 “주먹을 휘두른다”가 아니다.
“팔을 붕붕 돌려 힘껏 뒤로 젖힌 뒤, 펀칭 머신을 치듯 꽂아 넣는 펀치”라고 적으면 애니메이터는 타격감의 리듬을 잡을 수 있다.
“단단한 갑옷” 대신 “때리면 둔탁한 쇳소리가 나는 무거운 무쇠 재질”이라고 적으면 사운드 디자이너가 이펙트 음향을 준비할 수 있다.
때로는 단순한 설명 보다는 ‘대비’가 효과적일 때도 있다.
이 숲은 조용하다가 아니라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진공 같은 침묵”이라고 적어 사운드 담당자에게 ‘고요한 느낌’을 제안하는 식이다.
사운드 담당자는 즉시 배경음악(BGM)을 끄고(Mute), 플레이어의 발자국 소리만 강조하는 연출을 떠올릴 것이다.
물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적는 것도 효과적이다. “단단해 보이는 갑옷”보다는 “때리면 둔탁한 쇳소리가 나는 무거운 강철”이라고 적으면 타격감 기획의 단초가 된다.
간단한 스케치나 다이어그램도 ‘기획서’다.
“글쓰기 실력보다 졸라맨 그림이 낫다.”
초보 기획자일수록 ‘기획서’라고 하면 기승전결 구조가 잘 완결된 하나의 완성된 문서라고 생각하기 쉽다.
특정 직군에서는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설정 기획자의 문서는 ‘휴지 조각’으로도 기획서가 될 수 있다.
복잡한 관계도, 맵의 구조, 사건의 연대기는 글로 풀면 아무도 안 읽는다. 텍스트 위주의 설정은 머리속에 그려지지도 않을 뿐더러 지루하기 짝이없는 구조다.
도식화(Diagramming)하는 습관을 들여라.
잘 그릴 필요 없다. 네모와 화살표면 충분하다. 각 캐릭터나 스토리 사이의 관계도를 연결하고, 때로는 그것을 그룹화하여 시각적으로 유사한 것과 먼 것을 구분해 보자. 그러면 설정 기획자 자기 스스로도 머리속에 엉켜 있던 개념이 하나로 잡히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플로우차트나 마인드맵은 이러한 복잡한 인과 관계나 퀘스트 동선을 설명할 때 굉장히 효과적인 도구다.
실제로 필자는 ‘피그마Figma’라는 프로토타이핑 툴을 사용해서 우리 게임의 초반플로우를 보기 좋게 정리한 바 있다. 이러한 시각화는 한 눈에 구조가 눈에 들어오므로 내가 쓰는 문서를 더 쉽게 이해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Draw.io라는 프로토타이핑 툴도 굉장히 강력한 비주얼라이징 툴이다. 특히 프로그래머와 함께 일할 때 테이블이나 그 사이의 관계 로직을 짤 때 유용하다.
만약 함께 일하는 사람이 컨셉 아티스트나 애니메이터라면 스토리보드를 그려보는것도 도움이 된다. 실제로 만화를 그릴 필요는 없고, 자신이 생각한 구도나 흐름에 가장 유사해 보이는 흐름대로 이미지를 찾아서 배치하면 된다.
정말 본인이 꼭 원하는 구도나 장면이 있다면 스케치해서라도 보여주자. 글로 묘사하는 것보다 대충이라도 4컷 만화처럼 그린 결과물이 낫다.
카메라 앵글과 동선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 작업은 최소한 글로만 써서 작업하는 것보다 작업 속도와 퀄리티가 분명히 더 나을 것이다.
설정 기획자의 최후의 조력자: 플레이어
설정 기획자가 자신의 업무를 마치는 순간, 그가 만든 설정은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설정 기획의 결과물은 다른 협업 파트너의 손에 의해 탄생한다.
그리고 창조적 결과물의 반응은 다른 누구도 아닌 ‘플레이어’로부터 나온다.
이제는 설정 기획자가 협업 파트너에게 ‘설정’의 지분을 넘겼던 것처럼, 협업 파트너가 만든 결과물이 냉정하게 시장에서 평가받는다.
플레이어는 냉정하다. 좋은 건 좋다고 하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한다.
그리고 좋은 설정과 싫은 설정을 빠르게 분간해낼 수 있다.
그들이 좋아하는 설정은 빈틈없이 꽉 차있는 설정이 아니다.
그들이 알아서 ‘해석할 수 있는 설정’. 그리고 그게 협업 파트너의 손에서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게 플레이어는 게임을 하며 게임 곳곳의 요소들을 바탕으로 게임을 해석하고 분석하며 해체하기 시작한다.
게임을 하는 것만큼 해체 작업도 그들에게 재미있는 작업이다.
그렇게 설정 기획의 마침표는 결국 플레이어가 찍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세계를 ‘해석’할 여지를 남겨라.
설명충이 되지 마라.
모든 설정에 정답을 적어두면 플레이어는 할 일이 없어진다.
설정이 빼곡하면 빼곡할 수록, 그리고 기승전결을 모두 낱낱히 기록해둘수록 플레이어는 흥미로워하기보다는 지루해한다.
‘프롬 소프트웨어(다크 소울 시리즈, 엘든 링 등)’가 왜 설정 기획의 바이블로 불리는지 생각해 보자.
그들은 설정을 다 설명하지 않는다. 그 대신 설정을 작은 조각으로 파편화해서, 곳곳에 흩뿌려둔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하드코어한 액션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고 게임을 시작하게 되지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세계관과 설정의 서사를 파헤치는 고고학자가 되어있는 경우가 있다.
어떤 무덤에 놓인 꽃, 깃발에 새겨진 각인, 어떤 연출의 미장센과 나비 효과 등등.
게임에서는 그 모든 것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플레이어는 커뮤니티에서 그러한 상징물의 의미가 무엇일지 서로 토론하며 세계관을 자신의 색깔로 바라본다.
빈칸은 미완성이 아니라, 플레이어에게 이곳이 바로 당신이 활약할 곳이라고 초대하는 초대장이다.
공식 설정집에 ‘이 캐릭터는 이러이러해서 저러저러한 일을 했다.’고 적지 말자. 그 대신 ‘이 캐릭터가 이러이러한 일을 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라고 적어라.
대신에 그의 소지품에서 어떠한 물건이 나와서 저러저러한 흔적이 있었을 뿐이라고 적어보자. 그렇게 확정을 추측으로 넘긴다면 플레이어들은 환호하게 될 것이다.
플레이어는 게임의 신이다
단언컨대, 플레이어는 설정 기획자의 최고의 파트너다.
게임은 출시되는 순간부터 기획자의 손을 떠난다. 이후 세계를 확장하는 건 플레이어들의 ‘2차 창작’과 ‘팬들의 토론’이다.
설정 기획자는 내 설정이 플레이어들의 장난감이 되도록 허락해야 한다.
커뮤니티에서 각종 토론이 오가고 그게 비록 공식 설정과 어긋난 추측이라고 해도, ‘내 의도는 그게 아니다’라며 플레이어를 가르치며들면 안 된다.
때로는 미처 기획자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허점을 플레이어가 지적할 때, 또다른 플레이어가 그런 허점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해석해서 보강해주기도 한다.
그런 과정에서 기획자는 자신이 놓친 게 뭔지, 그리고 허점을 공격한 플레이어를 오히려 제지한 플레이어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게 기획자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은 플레이어들의 지속적인 관심 – 추측과 토론, 지적과 보완 – 을 통해 점점 채워져간다.
더 나아가, 플레이어가 발견한 버그나 밈(Meme)을 오히려 공식 설정으로 역수입하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플레이어는 이 게임의 신이다. 플레이어가 하는 모든 행동은 게임을 파괴하려는 행동을 제외하면 오히려 게임이 잘 되기 위해서 행하는 일이다.
게임 플레이만이 플레이가 아니다. 플레이 외적으로도 버그나 밈의 활용 또한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 중 하나이다.
그것을 공식에서 수입하고 재해석하고 어떠한 콘텐츠로 피워내는 것도 공식이니까 할 수 있는 의미있는 ‘보답’이다.
닫힌 결말 대신, 질문을 던져라
좋은 게임 설정은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로 끝난다.
“주인공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보다 “주인공은 과연 행복했을까?”가 더 긴 여운을 남긴다.
이 질문들이 모여 후속작의 동력이 되고, 커뮤니티의 수명을 연장시킨다.
플레이어에게 ‘답’을 주지 말고 ‘화두’를 던져라.
과연 그들은 행복했을까?
과연 이것은 해피 엔딩일까?
과연 이것이 진짜로 끝일까?
마치며: 설정 기획자의 센스
설정 기획자로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계속 ‘섬세한 감각’을 단련시켜나가는 게 중요하다.
아래는 설정 기획자가 기르면 좋은 몇 가지 감각을 뽑아본 것이다.
관찰 센스
지하철 안내 방송, 길거리 간판의 폰트, 편의점 진열 방식…
일상의 모든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왜 이렇게 만들었지?”**를 한 번 더 생각하는 습관. 그 디테일이 핍진성의 재료가 된다.
일관성 센스
오늘 쓴 설정이 3년 전 쓴 설정과 충돌하지 않는지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능력.
세계관의 ‘헌법’을 머릿속에 켜두고, 언제 어디서 누가 물어봐도 논리적 모순 없이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번역 센스
추상적인 설정(문학)을 개발 언어(기획서)로 바꾸고, 다시 그것을 플레이어가 느낄 수 있는 경험(재미)으로 바꾸는 이중 통역 능력.
동료가 이해 못 하는 설정은 소설이고, 유저가 느끼지 못하는 설정은 텍스트 낭비다.
현실 감각
“이 멋진 설정이 우리 엔진에서 돌아갈까? 우리 팀 인력으로 일정 내에 가능할까?”
이상을 꿈꾸되 발은 철저히 현실(리소스, 일정, 스펙)에 딛고 서 있는 냉철함. 이것이 아마추어와 프로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다.
※위 글은 Courera의 Game Design Course의 내용 일부를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