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임 기획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의 기획자로 구분될 것이다.
‘한 페이지 제안서’를 쓰는 기획자와, 그러지 않는 기획자로 말이다.
기획자의 삶

게임 개발의 최전선을 잠깐 상상해보자.
오늘도 회사에서 열심히 갈리고 있는 A 기획자와 B 기획자.
입사 동기인 두 사람은 서로 경력도, 맡은 업무도 비슷하지만 회사 구성원들의 평가는 극과 극이다.
오늘도 개발자나 아티스트와 한바탕(?) 하고 온 A 기획자는 ‘대체 왜 내 기획서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울분을 토하며 야근을 한다.
그 기획자 옆 자리에 앉은 B 기획자는 아까 1시간을 잡아뒀던 회의를 30분만에 해치우며, 느긋한 마음으로 퇴근을 할 준비를 한다.
이 두 기획자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커뮤니케이션 역량
두 기획자는 같은 팀으로서 유사한 업무를 했지만, 전혀 다른 결과를 맞이했다.
한쪽은 기획서를 퇴짜맞아 야근을 해서라도 고쳐야하는 반면(그 와중에 본인도 기분이 상하는 건 덤이다), 다른 한쪽은 기획서가 스무스하게 통과되어 오늘도 편안한 마음으로 퇴근을 해도 된다.
두 사람은 다른 부서 사람들과 함께 ‘협업(조율)’을 했다는 상황은 똑같았다.
그런데 왜 이런 정반대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 걸까?
사실 이런 일은 게임회사에서 꽤 흔하게 발생한다.
오죽하면 게임 기획자를 뽑을 때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난 분’을 찾는 게 아니다.
많은 기획자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협업 파트너에게 전달함에 있어 어려움을 겪는다. 단순히 기획서를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애초에 협업 상대방이 무엇을 기대하는지조차 모르고 회의에 들어가는 경우도 흔하다.
내가 바라는 것을 상대도 바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상대가 바라는 것을 미리 알고, 내가 그에 맞춰서 내가 얻어내고자하는 것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반드시 통과되는 제안서를 쓰는 비결’이다.
자, 다시 앞으로 돌아가보자. 과연 이 두 사람은 무엇 때문에 정 반대의 결과를 맞이했던 걸까?
그건 바로 ‘협업 파트너와 사전 조율을 마쳤는가의 여부’에서 운명이 갈렸던 것이다.
협업 파트너
당신이 생각하는 협업 파트너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사실 정답이 따로 없는 질문이다.
누군가는 같은 팀의 팀원과 팀장 정도까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프로젝트 전반을 이끄는 PD나 PM, 클라이언트나 서버 개발자. 컨셉 아티스트나 UI 아티스트 등 직군과 직책에 상관없이 회사에서 만날 수 있는 사실상 모든 사람도 협업 파트너라고 할 수 있다.
협업 파트너라는 용어에 관해 독자 분들의 생각하는 범위가 모두 다르다면 이하의 내용을 읽고 따라오시는 데 조금 혼란스러울 만한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원활한 설명을 위해, 필자는 여기서 협업 파트너의 범위를 기획자가 쓴 기획서를 받아보는 ‘유관부서 담당자’라고 정의하겠다.
사전 조율
기획자가 쓴 기획서를 받으면 입 다물고 만들기만 하면 되지 무슨 놈의 얼어 죽을 사전 조율?
이렇게 생각하는 기획자가 있다면, 아마 그는 회사에서 언제나 화가 나있는 기획자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그 중 십중팔구는 커다란 반발에 부딪히면서 삐걱대는 현실을 마주할 가능성이 높다.
사전 조율이란, 일종의 ‘아이스브레이킹’이다. 기획서를 받아볼 사람들도 또한 기획자와 똑같은 ‘사람’이다. 자신들도 이 프로젝트에 공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생각이 존중받기를 원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기획자가 일방적인 요구를 한다면 자신의 의견을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기획자의 문서에 방어적인 태도로 나오게 된다.
소위 말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나신 분’을 모시는 회사는 대충 이런 사람을 원한다고 보면 된다.
1페이지 제안서 = 협업하는 기획자
1페이지 제안서는 ‘협업 파트너와의 사전 조율’을 위한 문서다.
즉, 1페이지 제안서를 쓴다는 건 협업 파트너와 사전 조율을 하면서 업무를 하는 기획자가 된다는 걸 의미한다.
1페이지 제안서는 게임 개발 과정에서 기획자와 협업 파트너 간의 원활한 소통과 이해를 돕는 강력한 도구다.
고작 1장의 문서가, 누군가의 귀중한 퇴근 이후 시간을 만들어주거나, 사람들과 더 즐겁게 일을 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만능 열쇠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바로 그 ‘1페이지 제안서’라는 건 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
1페이지 제안서
1페이지 제안서가 무엇인가
1페이지 제안서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1페이지라는 짧은 분량으로 협업 파트너와 사전 조율을 위해 준비하는 제안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분량이 긴 문서를 싫어한다.
100페이지에 달하는 기획서는, 쓴 사람은 아마 ‘이만큼 고생해서 썼으니 모두가 날 인정하겠지!’라고 착각하기 십상이다.
정작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그걸 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이 적지 않다.
1페이지 제안서는 (복잡하고 딱딱한 기획서와 달리) ‘나는 이런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의도를 솔직하고 간결하게 전달하는 문서다.
1페이지라는 분량 제한이 있으므로 쓰는 사람 입장에서도 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고, 읽는 사람 입장에서도 조금만 훑어봐도 요점이 드러나니 서로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된다.
누가 써야하는가
1페이지 제안서는 ‘모든 기획자’가 써야 한다.
기획자는 개발자, 아티스트와 달리 본인 혼자서 리소스를 만들거나 게임을 구현할 수 없는 직군이다. 즉, 기획자는 개발자와 아티스트와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가진 직군이다. 서로 원만하게 소통하지 않으면 원하는 결과물을 얻어낼 수 없다.
조직에 따라서는 개발자나 아티스트가 기획자에게 굉장히 친화적인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가령, 기획자가 하자는대로 이견 없이 다 해주거나, 기획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영역까지 챙겨주는 협업 파트너도 있다.
그러나 그런 조직에 익숙해진 기획자는 그런 태도를 가지지 않은 협업 파트너를 만날 때마다 고생하게 된다. 본인이 운이 좋아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1페이지 제안서를 쓰는 건 막내에서부터 팀장까지 가릴 것 없이 모두 써야 한다. 특히 누구보다도 ‘팀장’의 1페이지 제안서가 중요하다. 그 팀에서 쓰는 제안서의 기초가 될 뿐더러, 팀장이 쓴 제안서는 회사 내에서 가장 중요한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할 근간이 되는 문서일테니 그 중요도는 말할 수 없이 높기 때문이다.
언제 써야하는가
1페이지 제안서는 말 그대로 ‘제안서’이므로, 기획서를 본격적으로 작성하기 전에 쓰는 게 적절하다. 제안서와 기획서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문서의 ‘깊이’이다. 제안서는 주로 ‘왜 이것을 해야하는가’를 제안하고 설득하기 위한 문서이므로 개발해야 하거나 창작해야하는 대상에 대한 내용은 간략한 정도만 있어도 충분하다.
제안서가 무난하게 통과된다면 기획서를 쓰게 되더라도 제안서에서 얘기한 부분은 사실상 ‘허락을 이미 구했으니 꿈과 희망을 마음껏 펼쳐도 된다’. 물론 기획서 내용이 무조건 통과된다고 보장할 수는 없겠지만, 제안서 없이 무턱대고 기획서를 들이미는 것보다 훨씬 커뮤니케이션 공수가 적게 든다.
어디서 써야하는가
1페이지 제안서는 슬랙이나 카카오톡 등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최소한 Word나 구글 독스, 노션, 컨플루언스 등에 적어야 한다.
제안서의 내용이 받아들여지느냐 아니냐의 여부를 떠나, 제안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히스토리로서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제안서 내용을 바탕으로 기획서를 쓰게 된다면, 기획서 내용을 보고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은 제안서의 내용을 보고 난 뒤 기획서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추후 히스토리를 파악할 때도 제안서와 기획서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쪽이 전체적인 기획 맥락을 알아내기 용이하다.
슬랙 등 메신저형 협업툴은 물론 그 자체로 강력한 툴이지만 지속적으로 유지-관리되어야 하는 정보를 담기에는 부적절하다.
어떻게 써야하는가

THE ONE PAGE PROPOSAL(1페이지 제안서)를 쓴 패트릭 G. 라일리는 1페이지 제안서의 아래의 내용이 담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 제목
- 부제
- 목표
- 2차 목표
- 논리적 근거
- 재정
- 현재 상태
- 실행
그런데 위의 내용은 게임 기획자에게 필요한 항목은 몇 가지 되지 않으며, 특히 ‘재정’이라는 부분은 대다수의 제안서를 작성할 때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아닐 확률이 높다.
필자가 제안하는 제안서의 구성 요소는 아래와 같다.
- 제목
- 현황(제안의 배경 설명)
- 제안의 이유
- 기대효과(목표)
- 사용처(2차 목표)
- (선택) 제작 필요 스펙
- (선택) 레퍼런스
- (선택) 제작 방식
위 구성 요소 또한 반드시 저런 형태가 되어야하는 건 아니며, 1페이지 제안서를 읽는 독자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필요한 정보도 달라질 필요가위 구성 요소 또한 반드시 저런 형태가 되어야하는 건 아니며, 1페이지 제안서를 읽는 독자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필요한 정보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1페이지 제안서 작성 방법 및 레퍼런스는 기회가 되면 다음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왜 써야하는가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기획자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굳이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상대방과 커뮤니케이션을 해야하는가하고 말이다.
필자는 기획자가 협업 파트너와 같이 일할 때 저자세로 나가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회의를 하기 전에 피드백을 받아보자는 게 더 정확한 취지이다.
제 아무리 기획자가 다방면에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국 기획자의 바람을 이뤄주는 건 눈 앞의 협업 파트너다. 그들이 전문가이고, 그들이 없다면 원하는 결과물은 만들 수 없다. 그런 그들에게 피드백이나 조언을 구함으로써, 게임을 “함께” 만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 시작이 바로 ‘1페이지 제안서’라는 것이다.
만약 사전 조율 단계에서 협업 파트너가 ‘전혀 문제 없다’고 말한다면, 그 기획서는 보나마나 무난하게 통과할 것이다. 만약 피드백을 받았다 하더라도, 회의와 같은 공식석상이 아닌 곳에서 받은 피드백일테니 톤앤매너도 평소처럼 부드러울테고 회의처럼 시간과 참석자가 정해져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두 사람이 편할 때 함께 문제를 풀어나갈 수도 있어 더욱 매끄러운 진행이 가능하다.
결론
문서는 강력한 커뮤니케이션 도구다.
이러한 문서는 작성자뿐만 아니라 그것을 읽는 독자가 있음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 자명한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지만, 우리가 쓰는 문서를 누가 읽을 것인지, 읽고 나서 무슨 생각이 들 것인지 잘 눈치채지 못한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어떤 버튼을 어떤 색깔로 해 주세요’가 아니라, ‘왜 이걸 해야하는가’라는 부분, 즉 기획의 요점이다.
‘왜 이걸 해야하는가’. 협업 파트너를 이해하게 하거나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아티스트는 기획의도를 살리지 못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십상일테고, 기획자는 자신이 생각했던대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아 아티스트에게 실망하게 된다. 최악의 경우,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아이디어가 무시당하거나 기각되었다고 생각해 최악의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우리 회사에서도 필자는 우리 팀에 공식적으로 ‘1페이지 제안서를 쓰자’는 규칙을 만들었다.
그러자 컨셉원화팀, 개발팀 등 유관부서에서는 커뮤니케이션 부담을 많이 덜었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아이디어도 편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되어 좋았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그 전까지는 매번 크고 작은 커뮤니케이션 상의 갈등이 있었는데,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이러한 사소한 ‘프로세스’ 하나가 여러 사람들이 앓고 있던 피곤한 트러블을 말끔하게 해결해 준 셈이다.
물론 1페이지 제안서를 쓰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고작 1페이지 제안서를 쓰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제아무리 길어야 하루를 넘기지 않는다. (자료 조사가 많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이 정도 시간을 투자해서, 그 이후에 작성해야 할 수십 페이지의 문서를 수 페이지로 줄일 수 있다면 기획자와 상대방 서로가 대단히 이득인 결과가 아닐까?
정리해보자. 1페이지 제안서를 쓰는 이유. 그건 바로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과 협업하는
‘나’를 위해서다.


